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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co Cat Jan 09. 2016

오늘만 살 것처럼

태국 치앙마이에서 만난 쿠로쉬

“위험하지 않나요? 두렵지 않으세요?”
“내 운명이 내일까지라면 내 방 침대에 편안히 누워있다가도 끝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란에서 태어나고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난민 지위를 신청해 스웨덴에 살고 있는 쿠로쉬를 만났다. 굴곡진 삶을 산 그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깨달음이다. 라오스를 시작으로 태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부탄, 네팔, 티벳,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까지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라면 절대 가지 못할, 간다고 해도 부모님이 뜯어 말릴 곳들이었다. 사실 라오스를 혼자 여행한다고 했을 때에도 부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셨다. 공산주의 국가에다 아직 가난하고 인프라가 부족한 곳이라 어디 산 속에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하느냐고. 나는 비행기표를 사서 보여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제 쿠로쉬로부터 거의 2년 만에 이메일 답장이 왔다. 6개월을 생각하고 있지만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던 그의 여행이 2년이 걸린 것이다. 그는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쿠로쉬와는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태국 치앙마이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만났다. 버스 안에는 외국인이 4명 있었는데 미국에서 온 웨이트, 독일에서 온 요나스, 그리고 나는 육로로 국경을 넘는 긴 여정과 치앙마이에서의 며칠을 함께 했다. 웨이트는 클라이밍을 하러 왔고, 요나스는 여자친구와 태국에서 휴가를 보낼 예정인데 조금 먼저 와서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앉아서 가는 낡은 Sleeping bus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한 번 버스가 퍼졌다. 첩첩산중의 좁은 도로 위였고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내심 버스가 아예 멈춰버려 이곳에 고립되면 대단한 모험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무사히 국경 지방으로 도착해 미니밴으로 갈아탔다. 나와 요나스, 웨이트는 치앙마이까지 가는 전 여정의 표를 구입했지만 쿠로쉬는 돈을 아끼기 위해 구간 별로 구입한 모양이다. 나름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요령이었겠지만 결국엔 우리보다 돈을 더 쓰고 약간의 사기도 당한 것을 알아챘을 때는 산신령같던 그도 살짝 열을 냈다. 회색의 긴 머리와 수염을 가진 그는 여행자라기보다는 부랑자같은 느낌을 풍겼다. 야무지게 싼, 장기여행에는 부족할 것 같은 크기의 가방과 곧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신발도 그의 내공을 대변했다. 팔다리가 곧 부러질 듯이 마른 그였지만 키도 크고 젊었을 때는 한가닥 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I don't want to see them. I want to know them." 그의 여행 철학이다. 그는 그냥 아무에게나 가서 앞으로 2시간만 따라다녀도 되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한번은 그런 식으로 결혼식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에게도 한번 그렇게 해보라고 권한다. 


치앙마이 도심으로 들어와 우리는 숙소를 찾기로 했다. 넷 모두 짐이 무거웠기 때문에 내가 네 명의 짐을 지키기로 하고 셋이 숙소를 찾으러 갔다. 만난 지 채 24시간도 안 된 낯선 사람에게 자기 짐을 맡기고 가버리다니. 사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마음먹고 가방 하나를 가져간다해도 나는 막을 재간이 없었다. 나머지 가방을 들고 뛸 수도 없고 긴 여정에 적잖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이 나에게 물어내라고 하면 어떡하지, 너무 오래 걸리면 어쩌지,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행 원칙 중 하나가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당할 것이 무서워서 벽을 치고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한다면 여행하는 의미도 없고 당하면 당하는대로 배우는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 경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숙소를 찾아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 사이 무사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때 살짝 울컥했다. 


각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만났다. 서빙하는 사람은 남미 또는 이베리아 반도 느낌이 풍기는 유쾌한 여자였는데 치앙마이를 여행하다가 그곳에 반해 눌러 앉게 되었다고 했다. 너무 멋있어서 감탄하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속물 근성이 머리를 빼꼼 내밀고 '그럼 결혼은? 직업은? 미래는?' 하고 방해를 한다. 아, 나는 영영 그렇게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까.


우리가 묵은 숙소는 로비에 먼지와 때가 뒤섞여 제 색깔을 잃어버린 낡은 소파와 오래 전 작동이 멈춘 것 같은 수조가 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였다. 방도 너댓 개뿐, 아마도 가정집을 불법으로 개조해 만든 듯했다. 저녁만 되면 게스트들이 이 로비에 모였다. 첫날 밤에는 중국에서 온 자매를 만났다. 동생은 고등학생이고 언니는 이제 막 대학을 입학한 듯 했는데 단 둘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며 한국 사람들은 드라마에서처럼 다 그렇게 예쁘냐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귀여웠다. 다음날 밤에는 프랑스에서 온 10대 남자 아이들과 중국인 자매, 나와 쿠로쉬까지 6명이 로비 소파에 둘러앉았다. 우리는 만났다하면 새벽 3-4시를 넘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 아이들은 어디서 화이트 위도우를 구해서 피우고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는 약으로도 쓴다고 괜찮다며 우리에게 권유하는데 '얘들아, 너희 눈이 흐리멍텅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비싼 돈 주고 요나스와 함께 래프팅/하이킹 프로그램도 했지만 이 게스트하우스의 먼지나는 로비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방콕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날이었다. 쿠로쉬와 함께 아침을 먹는데 식당에 이란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쿠로쉬는 잠깐 인사만 하고 오겠다 하고는 한 두 시간을 그들과 함께 이야기 했다. 나에게 미안하다며, 모국어로 이야기한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다는 그의 눈빛이 서글펐다. 젊은 시절을 다 보낸 고향에 더이상 갈 수 없는 그의 그리운 마음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미안했는지 그는 렌트한 오토바이로 나를 기차역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기차 시간이 급하긴 했지만 그는 좁은 골목에서 과속은 기본, 역주행에 차선변경까지 하고 신호는 가볍게 무시했다. 헬맷은 당연히 안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어느새 나도 빠른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다행히 기차역까지는 살아서 도착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를 두고 하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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