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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지나 Mar 18. 2017

편안한 숫자

곁에 두면 좋은 사람들은 몇 명인가요

여행과 일상은 큰 차이를 보일 때가 있고, 또 같을 때가 있다. 


나는 여행 중에는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열려 있고 걱정이 거의 없다. 돌발상황을 즐거운 변수로 받아들이고 꼬이는 상황에도 눈물 후 웃고 마는 블랙 코미디로 승화시키며 발가락에 피멍을 남기는 돌부리들도 곧잘 용서해준다. 반대로 일상으로 돌아오면 분 단위로 스케줄을 정리하여 움직이며 융통성으로 동네에 소문난 인물은 되지 못한다.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편안한 성격으로 치환되는 것이라,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반대로 여행과 일상에서 같은 것은 내가 편안해 하는 사람들의 숫자다. 작은 동네 카페에 앉아 있건, 끝이 보이지 않는 광장 한복판에 서있건 누구나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과 공간의 비율이 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모든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바글바글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도 있다. 나는 12월 첫째 주 수린 섬에 머무르는 사람들만큼이 딱 좋다.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이 위치한 수린 섬 여행 이야기를 하려면 <메카닉>이라는 영화의 속편부터 말해야 한다. 그저 그런 킬링 타임 영화가 땡기던 날, 마침 영화관에는 보고 싶은 영화는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여주인공 이름이 나와 같다는 유치한 이유도 덧붙여서 영화표를 구입한 목적에 충실하게 시간을 죽이고 나왔다. 두 시간이 지나고 남은 것은 스크린에 청명하게 소개 되었던 태국의 꼬 리뻬. 파리에서 작년 유월에 돌아와 한국 재적응을 한답시고 여름 휴가를 가지 못했기때문에 겨울에 반드시 더운 곳으로 떠날 것이라 마음 먹었던 차, 꼬 리뻬 여행을 부랴부랴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작년 12월 나는 태국에서 가장 예쁜 섬들과 해안가 마을을 헤매는 한달 간의 여행을 다녀왔지만 꼬 리뻬는 최종 여행지 목록에서 탈락하였다. 대신 수린을 발견해 다녀왔다. 


코사무이에서 수린으로 가는 버스와 배편을 찾는데 태국인들은 수린이라는 이름의 해변도 있다며 해변으로 가는지, 섬으로 가는지를 물었다. 섬이라는 내 대답은 주변의 여러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고향 또는 자국의 소문난 여행지를 소개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으레 묻어나는 자부심은 한 톨 없이, 경외와 감탄만이 있어 생경했다. 


Mu Ko Surin.


수린은 아침, 점심, 저녁끼니 즈음 한 시간 반 동안 문을 여는 매점 겸 식당 하나와 고르는 재미도 없는 똑같이 생긴 텐트를 제외하면 바람과 태양이 만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섬이다. 앞뒤 일정이 여러 번 바뀌고 교통편도 불편해서 준비를 많이 못해 갔는데 오히려 그렇게 된것이 더 좋았다. 일주일 정도 머무르는 사람들 중, 특히 준비성 뛰어난 한국 여행자들은 아이스 박스와 배낭에 여러 종류의 음료와 먹을 것, 노트북과 보조 배터리, 멀티탭 등 한 짐을 꾸려 오는데 부족한 것이 많았던 머무름이 꼭 필요했던 시기여서 그런지 가벼운 두 손이 편했다. 


전기는 하루 네 시간 들어오고, 전화 통화는 아예 불가능하다.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바다에 나가는 털털거리는 스노클링 나무 배를 타고 물놀이를 하다 들어와 밥을 먹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거나 친구를 새로 사귀거나 졸거나 하는 것이 전부인 하루를 세 번 반복했다. 식당 여는 시간이 다 가도록 자버리면 한 끼를 굶어야 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매점에서 사 놓은 밀가루맛 과자는 어느 새벽에 오도독 해치웠고, 여행 전 광화문 촛불 집회에 들고 나갔던 LED 양초는 혼자 가기엔 살짝 겁이 나는 화장실 가는 길을 밝혀주었다. 


하늘과 모래와 파도가 세상의 모든 공간을 빈틈없이 나누어 갖는다. 

셋 말고는 세상을 채우는것이 없다. 눈이 편안하고 마음이 차분하다. 

셋은 각자의 영역을 조용히 지키며 저마다 그 안에서의 작고 흐뭇한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수린에서는 모든 전선과 전파로 뒤엉킨, 보이지 않는 연결을 끊고, 물보라와 웃음 소리와 서로 살아온 인생의 결이 새겨진 손길 - 만질 수 있는 관계들을 맺는다. 


각자의 이유로 같은 곳에 모인 사람들은 환영하는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좀처럼 말을 걸어 오지는 않는다. 묻는 말에 대답이 짧으면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을 금방 헤아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뜨는 센스도 있어 좋았다. 처음 시켜 먹는 메뉴가 잘 넘어가지 않을 때 이걸 뿌려 먹으면 훨씬 낫다며 작은 소스통을 놓고 가는 수린 베테랑 선배도, 함께 보트를 빌려 여기저기 가보자는 활기 넘치는 스웨덴 커플도 있었다. 해변을 걷던 두 번째 아침에는 10년째 수린 섬을 찾는다는 이탈리아 할아버지를 만나, 벌써 한 달 째 수린에 머무는 브라질 여자에게 가져다 줄 돌을 줍기도 했다. 그녀는 거기에다 작은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수린을 좋아하게 만든 이유에는 나와 같은 시간 이 섬에 머무르던 사람들 모두가 포함된다. 단 한 명도 필요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텐트 바로 앞까지 밀려 오는 듯 크레센도를 그리는 파도 소리가 무서워지려 할 때 들려오는 옆 텐트의 코고는 소리에 안도 하던 깊은 밤도 있었고, 쉴 새 없이 웃고 떠드는 테이블이 매일 밤 하나씩은 있었지만 그들을 따라 웃는 순간도 그래서 매일 밤 있었다.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누군가가 동트기 전 남긴 발자국을 보고 싱긋 웃었고, 스노클링을 하러 가서는 물고기가 더 많은 곳을 가리켜 주던 손가락 덕도 톡톡히 보았다. 



갑자기 노랫말이 잘 써지는 순간이 올 때 고개를 들어 카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나 헤아려 본다. 버스 안에 앉아 꾸벅 졸려는 찰나면 눈대중으로 또 몇 명이 함께 탔나 세어 본다. 다른 모든 여건이 같지 않지만 수린에서 느꼈던 편안한 기분이 다시 선연하다. 또 얼마간 기대어 볼 수 있는, 좋았던 날들의 편린이 나타나주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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