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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Aug 13. 2021

EP34. 삶은 일기예보와도 같아서

엄마가 아프다

 

 백일도 안 된 아기를 키우는 데다 연일 심각해지는 코로나까지, 집 밖을 나서는 게 두려워져 요즘 내 일상은 집안에만 머물러 있다. 폭염도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도 거실 소파에 앉아 커튼 너머로 확인할 뿐이다. 아이를 위해 일정 온도로 늘 에어컨을 켜놓고 살아서 바깥 온도를 온전히 느낀 게 언젠지 가물가물하다. 여행은커녕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요즘, SNS에 남겨둔 지난 기록을 통해 마스크 없이 활보하고 다녔던 과거의 오늘을 확인하며 추억하는 게 또 하나의 재미가 되어 버렸다.




 7년 전 여름, 길지 않은 방학이라 무더운 날씨에도 점심 저녁으로 빡빡하게 약속을 잡고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8월의 어느 날, 저녁 약속이 취소되어 애매한 시간에 귀가하면서 엄마가 만든 비빔국수 생각이 간절해졌다. 더위에 지친 날 허기진 속을 달래기에 그만한 명약도 없어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대충 끼니를 때운 엄마에게 되지도 않는 애교로 비빔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에 엄마의 눈대중과 손맛으로 만든 양념장을 넣어 쓱쓱 비빈 국수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만날 밖에 나가서 혼자 맛있는 거 먹고 신나게 돌아다니는 딸, 나 같으면 얄미워서 핀잔만 실컷 줄 것 같은데 엄마의 음식은 언제나 친절하다.


엄마의 비빔국수


 “엄마, 어쩜 이리 맛있어?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레시피 좀 배워야겠어.”


 두서없는 칭찬으로 나의 철없음과 민망해진 마음을 무마해 보려고 애쓰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신나게 먹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만드는 방법을 일러준다. 엄마의 레시피는 늘 ‘대충 적당히 간 맞추면’으로 끝이 나지만, 그 ‘대충’이 진짜 대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난 늘 엄마의 솜씨를 배우지 못하고 먹기만 했다. 배울 수 없는 레시피를 기분 좋은 배경음악 삼아 한 그릇 뚝딱 해치운 뒤 기분 좋은 배부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고 8년이 지난 지금도 난 변함이 없다.


 아이를 낳고 엄마는 일주일에 두어 번 30킬로나 떨어져 있는 우리 집에 온다. 아이 보느라 밥도 제대로 못 차려 먹을 딸이 마음에 걸려 반찬이며 국이며 찌개까지 양손 가득 무겁게 챙겨 오면서 손녀딸이 눈에 밟혀서 자꾸 온다는 핑계를 앞세운다.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엄마에게 미안해지기 싫어서 제발 해오지 말라고 당부하는 나의 까칠함 때문에 엄마는 해주고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입추를 지나 말복을 하루 앞둔 월요일, 엄마는 육개장을 한솥 끓여 우리 집에 왔다. 식재료 하나도 원산지를 꼭 살피고 유기농을 선호하는 엄마의 육개장은 제주도산 고사리에 1등급 한우가 들어가 과하게 정성스럽다. 수유 중인 딸을 위해 최대한 맵지 않게 슴슴하도록 간을 맞춰 끓여낸 육개장을 다음 날 아침에 맛있게 먹겠다고 말한 뒤 주방 한 켠에 두었다. 싱거우면 좀 더 끓이고 짜면 물을 좀 넣으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다음 날 먹을 딸의 끼니 걱정만 하다 간 그날은 지난 건강검진 후 결과가 좋지 않아 받은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온 날이었다. 결국 엄마에게도 외가의 가족력은 마수를 뻗치고 말았다.


 그날 밤, 바깥 온도가 제법 선선해져 하루 종일 켜 둔 에어컨을 껐다. 갑자기 올라간 습도때문인지 깊게 잠을 못 자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밤새 시달리다 날이 밝았고 늦은 아침을 챙겨 먹으려 육개장을 데웠다. 맛있게 한 술 뜨려는데, 평소와 다른 시큼한 맛이 난다. 하루는 괜찮겠지 안심하고 전날 밤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아 하루 만에 쉬어버렸다. 에어컨 한 번 안 켜고 땀 뻘뻘 흘리며 정성으로 끓인 엄마의 육개장을 여름밤 선선한 바람만 믿고 방치해 버린 탓으로 아깝게 버려야만 했다.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힘든 줄을 모른다


 아이를 폭 안고 내려놓을 줄 모르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수리가 훤히 보일 만큼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늙어버린 엄마의 모습에 서글퍼졌다. 엄마의 그늘 아래 내 삶은 늘 봄 혹은 가을 같아서 여름의 더위도 겨울의 추위도 버틸 수 있었다는 걸 나이 마흔 먹어서야 조금씩 깨달아 간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휙휙 바뀌는 게 인생이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수두증 판정을 받은 엄마가 미안해하는 아들에게 건네는 대사 한 마디가 마음에 콕 박혔다. 삶은 일기예보와도 같아서 언제 그 모습을 달리할지 알 수 없지만 쉬이 바뀌는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듯이 삶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의연해지려 노력해야 한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하는 엄마가 겪을 마음고생에 쓰이는 마음을 염려가 아닌 위로로 보답할 것이다. 엄마의 여름에 그늘이 되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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