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커피 마시고 싶어? 사다 줄까?”
출근하기 전 신랑이 내게 묻는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로 이어진 지난 1년간 카페인 음료를 끊고 살았으나 난 하루 커피 한 잔은 꼭 마셔야 하는 커피 마니아였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임신 초기에는 커피 자체를 멀리하다가 아메리카노의 깔끔하고 씁쓸한 맛이 너무 그리워서 임신 중기 이후부터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나를 위해 허락하기로 했다. 다른 프랜차이즈 디카페인도 마셔 보고, 집에서 캡슐 커피로 내려 마셔도 봤지만 묘하게 내가 느끼는 청량감이 달라 결국 다시 찾게 되었다. 밥 한 끼까진 아니라도 분식으로 한 끼 배를 불릴 수 있는 비싼 커피를 굳이 테이크아웃까지 해서 마셔야 하나 지금도 여러 번 되묻곤 하지만 신랑은 한 번도 내게 그런 의아함을 비춘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마도 우울하다가도 커피를 받아 들고 홀짝이면서 행복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출근하고 나면 8시간을 꼬박 아이 보느라 애쓰는 나의 기분 전환을 위한 기회비용이라고나 할까.
나의 첫 아메리카노는 스물셋 장대비가 쏟아진 어느 여름날 스타벅스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로 몸을 피할 곳이 필요했고,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스타벅스뿐이었다. 이끌리듯 들어가 가장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대학교 4학년, 돈도 시간도 여의치 않았던 내게 사치와도 같은 호사였다. 씁쓸하지만 폐부를 타고 내려가는 뜨끈한 온기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굵어지는 빗방울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흐르는 재즈, 커피 한 잔을 두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묘한 이질감이 나쁘지 않았다. 쳇바퀴 굴리듯 바쁘기만 했던 대학교 4학년, 나에게 허락한 여유는 비가 그치기 전 다 식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 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에 끝이 났으나 커피를 생활화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비 온 뒤 거짓말처럼 맑게 갠 하늘만큼이나 그날 이후 내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술 한 잔 할 줄 모르는데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묻는 이들에게 커피는 내게 그대들의 술과도 같다 대답한다.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술 한 모금 못 먹는 숙맥이라 쓸 데 없는 자격지심까지 가져가며 부러워만 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그 지역의 유명한 커피를 찾아다닌다. 좋은 풍경 혹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에서 여유를 찾고 활력을 얻는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삶에도 가끔은 다이어트가 필요한 법이니까.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는 게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처럼 허전해서 임신 초기엔 커피 자체를 끊어 보려고도 했으나 이상하리만치 삶이 퍽퍽해지는 것 같아 가끔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커피를 처음 접한 순간을 떠올려 보니 카페인 자체가 좋아 커피를 즐기게 된 건 아니었다. 결국 커피에 스스로 투영한 가치에 맞게 스스로에게 여유를 두기로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신맛이 적고 적절히 묵직한 바디감에 속까지 개운해지는 아메리카노가 나는 매일 고프다.
귀한 아이 하나만으로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우면 좋겠지만 쌓여가는 피로와 단조로운 일상 속 약간의 울적함은 피할 수 없다. 번쩍이는 장면에 눈을 돌리는 아이 앞에서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니 오랜만에 즐겨 듣던 라디오를 켜고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달랠 수밖에. 언젠가 다 큰 딸아이와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눌 날을 고대하며 스타벅스에 비용을 지불한다. 출근 전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커피 배달을 자처하는 신랑의 살뜰함까지 더해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