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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Oct 01. 2021

15. 엄마의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

“쌤, 아기 너무 예뻐요. 육아는 어떠세요?”
“아기는 예쁘지만 육아는 좀 고돼요.”


 곧 결혼을 한다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해 온 전 직장 동료가 결혼하면 자신도 아이를 빨리 낳고 싶다며 육아에 대해 물어왔다. 나이 마흔에 기적처럼 찾아와 태명도 축복이라 지어준 예쁜 딸아이를 보면서 시간과 요일 개념을 잊은 채 세월을 살아내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보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기쁘다가도 아이가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모든 게 내 잘못 같아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는 게 엄마라 한 달에 이틀 혹은 사흘 정도 푹 쉬어야 지나가는 편두통을 아픈 쪽 관자놀이만 꾹꾹 누른 채 끙끙 앓았다(임신중엔 편두통 한 번 없이 머리 컨디션이 최상이었는데 일생을 임신인 채 살 수도 없으니 원!). 당연히 아이와 보내는 일상이 마냥 즐거울 리 없었고,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아이 옆에 누워 장난감만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평소와 다른 엄마를 곁눈으로 힐끔 보더니 자기 손가락을 맹렬하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아이가 손가락을 쪽쪽 빠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많은 이유 중 유독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문장만 둥둥 떠올라서 평소처럼 온 에너지를 쏟아 놀아주지 못하는 게 죄스러워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던 아이가 꽤나 빈번하게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이면 전전긍긍 애태우기도 한다. 일이든 취미든 그 안에서 성취감을 누려야 삶에 생기가 도는데, 요즘 내 성취감의 유일한 대상은 본의 아니게 아이가 되어 버렸다. 물론 아이가 조금 더 크면 그 유일함과 몰입도도 조금은 사그라들 일이지만 건강한 엄마가 되려면 아이가 내 인생에 전부가 되어선 안 될 일이다. 아이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를 돌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몇 가지 노력을 해보기로 다짐했다.


나는 아이가 지루하지 않도록 놀아주는 게 가장 어렵다




 이른 아침 밤잠을 마친 아기는 보통 여섯 시에 기상해서 아침 분유를 먹고 남은 잠을 청한다. 아이 옆에 누워 함께 선잠이나마 청 해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무선 이어폰을 챙겨 기분 좋을 정도의 쌀쌀함을 머금은 아침 공기를 마시러 산책을 나서곤 한다. 이어폰 하나에 몇 십만 원이라니. 노이즈 캔슬링은 차치하고 일반 이어폰은 귓구멍 입구에서 헛돌아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한 비싼 이어폰이 요즘 따라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다.


 홀몸일 때에는 언제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변의 잡다한 소리들을 작은 이어폰 하나로 차단한 채 체력이 허락하는 만큼 걸었고, 시끄러운 카페에서도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몰입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원하면 내 의지대로 시간과 체력을 마음껏 활용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임신을 하면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임신 중엔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몸을 사렸고, 출산 후에는 아이에게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 게 너무 당연해져 버렸다. 주변의 소리에 더 집중해야 하고, 아이의 울음소리와 옹알이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게 무용지물이 되어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이어폰을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아침 걷기에 활용하기로 한 건 임신 전, 애써 다져둔 몸매가 멋대로 망가진 채 돌아올 줄 모르는 기간이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골반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마구 둥글해져 버린 몸을 볼 때마다 자존감에 적신호가 켜지기 일보직전이라 이대로 두면 안 될 일이었다.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잠시 아이를 잊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최소한의 이기심 정도는 필요하지 싶다.


 이따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머물다 가곤 하는데, 이런 감정들에 매몰되거나 도취되기보다 요리조리 곱게 다듬어 글에 녹이는 걸 취미로 삼아 아이와 나를 위한 선물을 차곡차곡 쌓아두려 한다. 육아를 하면서도 틈만 나면 뭔가를 끄적이고 싶어 생각이나 감정이 툭 마음을 건드릴 때마다 메모장을 켜고 부지런히 적어 내린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날 선 감정들이 이라는 그릇에 담겨 멋지게 재활용되는 순간들을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 어린이집에 보내고 복직을 할 계획이다. 아이를 낳기 전,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백일 된 아이를 두고 복직한 동료 교사와 퇴근 후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아직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학교에 나와도 괜찮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이는 늘 눈에 밟히지만 이대로 집에 있기에 도태될까 너무 초조하더라고요.”


 그땐 그래도 아이가 우선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공감하기 어렵던 그녀의 말이 요즘 따라 그렇게 생각이 난다. 엄마이기 이전에 교사로서의 나를 등한시하기에 난 내 일이 너무 좋아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언제 돌아가도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읽고 쓰고 공부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엄마가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이라 제목을 붙였지만 이렇게 적고 보니 거창할 것도 유난할 것도 없지 싶다. 엄마가 되기 전이든 엄마가 된 후든 ‘나’라는 사람은 달라질 게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좀 달라진 게 있다면 늦은 나이에 낳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냥 그저 그렇게 나이 든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나의 다짐은
죽기 직전까지 유효하고
그런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
엄마인 나의 자존감은 늘 무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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