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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Oct 05. 2021

EP13. 글로 맺어진 부부의 연

행간에 담긴 마음을 읽는 사람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일하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남자와 여행은 좋아하지만 남미는 평생 살아도 갈 리 없다고 단언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심지어 혼자 살아야지 단단히 마음먹은 내 나이 마흔에,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작년 4월의 어느 밤이었다. 퇴근 후 글모임(동호회 어플 소모임 내 ‘사각사각’)을 진행하려고 동묘로 향했고, 촉촉한 봄비가 내린 직후라 피곤한 금요일 밤도 썩 나쁘지 않았다. 참석자 네 명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구면이라 익숙한 자리였지만, 초면인 단 한 사람 지금의 신랑에 대해 아는 정보란 그가 쓴 이전 글이 전부였으니 운영진으로서 모임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모임 전 도착해 그의 글들을 읽어 봐야만 했다. 무겁고 진중한 글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는 조금 상반된 글이었지만 위트 있는 표현과 기발한 발상이 신선했다는 말로 친근하게 다가가야겠다 마음먹은 찰나 그가 등장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는 날카롭고 날렵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운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쑥스러워 눈을 피하는 게 귀여워서 자꾸 말을 걸었던 것도 같다(그때까지만 해도 귀여운 남동생 정도로만 친해질 줄 알았다).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그의 집과 내 직장이 같은 동네라는 걸 알았고, 같은 날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카풀 해도 되겠다는 말을 통상 하는 인사처럼 건넸다. 아마 그 말이 우리 관계의 시발점이었을까. 당최 용기라곤 없어 보이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린 내가 다니는 직장의 풍경을 보고 어딘지 알아냈고, 너스레를 떨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6월의 어느 날, 그와 나 단둘이 만나 이른 저녁을 먹었고 그날도 처음 만난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2020년 4월의 어느 금요일 밤


 나는 글에 지난 경험을 자주 녹이는 편이라 과거 연애사는 아주 좋은 안줏거리일 수밖에 없고, 그를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도 ‘관계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마음을 심하게 앓던 서른하나의 봄날 이야기를 글로 적어냈다. 이미 축적된 내 지난 글 속에 살아온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았고, 내가 그의 글을 통해 그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그도 내 글을 읽으며 별다른 질문 없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간에 담긴 마음을 읽어내려갈 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어떤 사람을 얼마나 만났는지는 그에게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의 소중한 마음을 내게 고백한 그날만은 남들에게 흔히 털어놓을 수 없는 묵직한 내 진짜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기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를 나지막이 꺼냈고, 그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짤막한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을 보듬었다.


“그게 뭐 어때서? 난 괜찮아. 많이 힘들었겠다.”


 나보다 더 내 지난 이야기에 공감하며 눈물을 글썽일 줄 아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그는 모임에서는 쓰지 않았던 묵직하고도 진중한 이야기들을 매주 한 통 내게 쓰는 편지와 매일 쓰는 일기장에 꾹꾹 눌러 적었다. 일 년 뒤 빼곡히 적어놓은 노트가 내 손에 놓일 때 프러포즈를 하겠다던 그의 다짐과도 같은 약속이 갑자기 찾아온 아이 덕에 완성도 채 되기 전에 이뤄져 버렸으나 결혼한 후에도 그의 일기 쓰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고 그의 일기 쓰기는 1년을 채우고 자연스레 끝이 났지만 주간으로 배달되는 그의 편지는 일흔세 통째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매주 건네는 편지들


같은 집에서 수많은 순간들을 공유하는 부부가 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 조금은 쑥스럽고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모른 체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엔 비일비재하다. 예전 어느 광고에서 부부 사이의 애정 표현을 두고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라며 희화화한 장면처럼 우린 가족이란 이유로 꽤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간다. 죽고 못 살아 결혼해 놓고 왜 가족이란 이름 앞에 서로에 대한 애정마저 점잖게 감추고 살아야 하는 걸까. 우리가 서로의 글을 통해 지나간 과거까지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처럼 서로를 향한 수많은 감정들을 글에 꾹꾹 눌러 담아 상대에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고이 둘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은 꾸준히 내게 건넨 그의 편지에 자주 답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은 긴 변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내 글을 읽고 이번 주엔 그가 어떤 마음을 담아 편지에 적어줄까 기대하게 되는 걸 보면 글이 부부 관계에 꽤 쓸만한 순기능인 것만은 분명하다.


고로, 글은 말보다 강하고 우린 그렇게 글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니 더 많이 표현하고 마음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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