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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Oct 09. 2021

16. 딸 엄마의 훈장

 아이를 낳고 한동안 뜸하던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올려두었더니 못 본 새 아이를 낳은 거냐며 축하 인사를 건네는데, 신기하게도 이전엔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거나 이젠 연락 없는 사이가 당연한 것처럼 전화번호로만 덩그러니 남은 인연들이 대부분이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은 단 하나, 나도 그들도 아이 엄마라는 것뿐인데 그 사실 하나로 느끼는 친밀감이란 정말 시공간을 초월할 만큼의 진한 동지애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딸인가 보네. 요즘은 딸이 대센데 좋겠다.”


 주변 지인들도 조리원 동기들도 아들 엄마가 더 흔한(물론 지극히 내 주변에 한정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요즘, 딸이 귀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느지막이 얻은 귀한 아이라 딸이든 아들이든 중요치 않았지만 나나 신랑이나 은근히 딸을 바라던 차였고, 그래서 성별을 확인한 순간 괜히 더 기쁘기도 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만약 아들이었다면 딸 하나 더 낳고 싶어질 수도 있었겠단 생각마저 드는 걸 보면 어지간히 딸을 바랐었던 것도 같다. 생후 5개월 차를 맞은 지금, 아직까진 딸을 키우는 나의 육아 만족도는 나름 최상이다.


 아이의 성별을 알렸을 때, 친정 엄마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데 기왕 하나 낳을 거면 아들인 게 낫지 않냐는 엄마의 말이 서운하다기보다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렵게 낳았지만 엄마의 막둥이 아들은 늘 엄마의 자랑이자 훈장이기 때문에 엄마의 딸인 나 또한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아들을 원할 거라 여겼을 테니까. 막둥이 남동생이 태어난 1989년 1월, 엄마가 갑자기 아이를 낳으러 가느라 나와 연년생 여동생은 단둘이 집에 남아 밤을 지켰다. 한 살 차이지만 큰놈의 역할은 톡톡히 해야겠단 생각에 동생 앞에서 의연한 척을 했던 것 같다. 하혈을 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에게 동생을 부탁하고 간 엄마가 자꾸 떠올라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남동생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때 내 나이 고작 국민학교 1학년 딱지를 뗀 아홉 살이었다.


어린 시절 19개월 차이 나는 나와 여동생

 

 그렇게 남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자르고 순남이라 불리던 여동생은 남동생이 태어나고 처음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길렀다. 여동생의 머리를 예쁘게 빗어주고 땋는 건 내 몫이었다. 다행히 우린 자매끼리 우애가 좋았고 남동생을 예뻐했다. 엄마의 불평등한 사랑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에 우산 꼭 챙기라고 백번을 말해도 놓고 가는 남동생의 태도에 하교 시간 이전부터 우산을 챙겨 들고 동생 학교 앞으로 나서는 엄마가 못마땅한 건 사실이었다. 다 해주고도 잔소리 몇 마디 했다고 남동생은 날이 선 말들로 엄마를 아프게 했고, 엄마는 자주 상처를 받았다. 그런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건 늘 나와 여동생의 몫이었다. 반복되는 패턴에도 변하지 않는 엄마가 안쓰러워 화도 났지만 잔뜩 생채기 난 엄마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서 하고 싶은 말들은 삼키기 일쑤였다. 아들을 향한 엄마의 맹목적이고도 집요한 애착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전히 견고해서 감히 무너뜨릴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런 엄마에게 딸이 둘씩이나 있어 참 다행이지 않냐며 같이 웃을 수 있으니 결국 난 아들보단 딸인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심장 위 훈장처럼 얹어 놓은 딸아이의 손


 아들이든 딸이든 모든 아이들은 귀하다만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동질감과 묘한 유대감에 난 내 딸아이와 함께 할 앞으로의 시간들이 기다려진다. 투박해져 가는 내 손가락을 곰질곰질 어루만지다 잠든 아이의 작은 손이 곰살맞게 반짝거린다.


나는,
작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딸을
훈장처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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