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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Dec 21. 2021

18. 고여 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엄마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아이의 낮잠 시간, 옆에 누워 함께 잠을 청하고 나니 금세 캄캄한 저녁이 되었다. 유독 낮잠을 길게 잔 어느 날, 배는 고픈데 딱히 먹고 싶은 건 생각나지 않아 이틀 전 먹고 남은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구마 껍질을 빠르게 벗기면서도 뒤집기와 동시에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진 아이가 걱정스러워 시선은 아이를 향해 있었다. 작은 고구마 절반쯤 입에 물고 오물거릴 무렵, 칭얼거려야 할 아이가 조용한 게 심상치가 않다. 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 한껏 힘을 주는 게 응가를 시전 하는 모양새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 싸고 시원한 지 헤벌쭉 웃어버린 아이를 보고 얼른 다가가 기저귀를 갈아주려는데 보기 드문 황금색에 박수를 치며 엄지척을 날려주었다. 남은 고구마를 먹으러 다시 식탁에 앉아 물끄러미 고구마를 바라보다 방금 본 아이의 대변 색이 잠시 떠올랐으나 크게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하필 고른 저녁 메뉴가 고구마라니. 비위가 약했던 난 어디로 갔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엄마가 다 되었나 보다.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란다


 얼마 전 지인들과 화상통화로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누군가는 이직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체감할 만한 이벤트들로 가득한 가운데 나의 근황 토크 차례가 왔다. 아이를 내 앞에 앉히고 “아기가 제 근황입니다.” 짧은 문장 하나로 대신했다. 사실이니까.


아이는 2021년 내 근황의 전부였다.


 헛헛했다. 아이의 표정은 부쩍 다양해졌고, 엄마를 보며 웃는 순간들이 늘어 덕분에 행복한데 묘하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핸드폰에 담긴 사진과 영상만 봐도 이벤트들로 가득한데 육아를 하는 엄마의 근황은 그냥 아이 키우고 있다는 말 한 마디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보다 몸무게가 세 배나 늘었고 금세 목을 가누더니 엎드려 기어 다니고 무언가에 의지해 서거나 걷기 시작했다고 말하려다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려운 호들갑이라 말을 아끼는 편이 나았다. 아이가 내 시간의 전부인 만큼 올해의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인데, 구구절절 아이의 성장에 대해 늘어놓는 건 어딘가 모르게 멋쩍었다고 해야 할까. 전할 말이 없어서, 내 근황이 뭔가 근사하지 않아서 초라해졌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매년 학기말이면 수많은 업무들로 분주한 가운데 새로운 학년 혹은 새로운 학교에서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 기대 반 긴장감 반으로 보내던 나의 12월은 분명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존재감이 강한 시간이었다. 여름 방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겨울 방학, 조금은 여유로운 여행 일정도 잡아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해를 기다리며 마음껏 설렜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한 해가 다 가버리는 줄도 모르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귀하게 얻은 딸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은 참 값지고 귀해서 ‘전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뭔가 죄스럽고 불편하지만 근황을 전하는 그 순간만큼은 가장 적절한 수식어였다. 얼마 전 복직에 대한 유혹을 겨우 떨쳐낸 탓에 아마 더 우울했던 모양이다.


 약간의 상실감과 허탈함에 주눅이 들어갈 즈음, 손을 내밀어 엄마를 찾는 아이를 보듬어 꼭 안아주었다. 삶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선택지 없는 내 선택과 집중은 결국 아이여야 하고 한 해 더 온전히 아이를 위해 고여있기로 마음먹었다.




 고여있는 물은 흐르지 않기 때문에 썩기 마련이다. 그러나, 엄마가 되어 아이와 함께 고인 내 감정과 시간은 멈춰있지 않는다. 특별히 새로울 건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단조롭지도 않은 쳇바퀴에서 아이 덕분에 나도 성장한다. 아이의 시간은 한정적이라 엄마로서의 경력을 묵직하게 쌓아가야 할 시기라고 여기며 한 해 짙은 향내로 고이기로 결심했다.



잔뜩 움켜쥘 줄만 알았던 아이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리며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만세 하는 자세로 아이는 잠이 들었다. 보송하게 적당히 마른 아이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엄마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속삭인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소중한 내 딸 다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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