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녕 Apr 16. 2023

뮤트(Mute)의 시간

나에게 노래는 주로 시냇물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 시냇가 주변에 머무르며 노래가 필요한 순간 시냇물에 손을 담근다. 손끝 지문으로 노래의 파동을 감지한다. 글을 쓰거나 공부하거나 가끔 집 앞 응봉산을 올라갈 때 그 파동은 몰입의 세계로 이끌었다. 내가 머무른 자리는 그대로이지만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는 음악의 무드에 따라 출렁거렸다. 거창한 설명이지만 그 누구나 그렇듯이 말이다.


요즘은 뮤트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재생 버튼만 다시 누르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지만, 그 버튼 앞에 손가락이 주저하고 있다. 음악이 달콤하지 않고 노이즈처럼 들린다. 소음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두 달 전 새로운 블루투스 이어폰을 장만하면서 노이즈캔슬링이란 기능을 처음 썼다. 이어폰을 끼고 왼쪽 버튼을 꾹 누르면 노이즈 캔슬링 모드가 시작한다. 주변의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만 들린다. 두세 번 정도 기능을 쓰다가 언짢은 기분이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서 케이스에 넣었다. 밀폐된 지하철 한 칸에서도 소음이 먼지처럼 미세하고 켜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앞으로 나가는 엔진 소리, 역에 도착해 끼익 멈추는 소리, 백색 소음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옆 사람이 주머니에 부스럭거리고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음악 소리, 옆 열차 칸을 움직이는 발걸음, 소곤거리는 말... 당연히 들리던 이것들이 다 소음이다. 평소보다 피곤한 날을 떠올리면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무실이나 길거리에 빽빽한 사람의 소음 속에 둘러싸였다. 소음은 내 신경을 자극하며 알게 모르게 나를 지치게 했다.


이어폰은 내 귓바퀴에 단단한 차단벽을 세워 소음 덩어리를 막는다. 소리를 여러 번 걸러내어 순수한 음악의 결정체만 흘려보낸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데 즐겁지 않다. ‘‘마이앤트메리’나 ‘The 1975’ 밴드는 언제든지 들어도 기본은 좋았던 앨범인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곤약 젤리 같다. 노래는 단순히 귀로 듣는건 아닌가 보다. 내 마음이 노래의 달콤함과 리듬의 신나는 기운을 받아들이기에는 지쳐 있다. 아니, 이미 수없이 맛본 음악이라 이보다 큰 자극이 필요하다. 잠시 뮤트(Mute)* 버튼을 누른다.


나이가 들면 감각에 둔 해지는 건지 생각한다. 몇 년 전, 회사 선배는 좋은 음악과 맛있는 음식이 주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말했다. 어찌나 덤덤하게 말하는지 그 지루함은 이미 인이 박일 대로 박혀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 보였다. 당시에 나는 선배의 고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원두의 로스팅이 잘 되어 풍미가 넘치는 아메리카노였다. 서글펐던 당시의 대화를 아메리카노의 풍미와 카페의 분위기로 얼른 지워버렸다. 


이제는 선배의 자리에, 그 마음에 목석같은 내가 앉아 있다. 음악이 소음이 되어버린 나, 머릿속에는 회사 업무로 가득 차 있다. 올해와 내년은 회사에서 고과 관리를 잘해야 승진으로 갈 수 있다.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은 아니다. 그저 차장 직급으로 승진하면 연봉이 많이 뛰기 때문에, 어차피 비슷한 일을 한다면 돈이라도 많이 받자는 마음이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자원해서 맡았는데 그 부담을 어찌하지 못해 음악도 제대로 못 듣고 있다. 일 년 육 개월 정도는 잠시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잠시만 이별이라고 생각해본다. 음악은 내 곁에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고, 그저 뮤트 버튼을 누른 것이라고 말이다.



*뮤트(Mute): 음소거

작가의 이전글 대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