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는 黑 검을흑자로 시작되는 '黑山흑산'이, 玆 검을자자의 '玆山 자산'이라 불리게 된 이유에 관한 영화다.
이준익 감독이 설명한 것처럼, 玆 검을자는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이 한 데 섞이면 나오는 검은색이어서 비록 검지만 모든 색이 거기에 다 숨어 있는 총 천연색이고, 黑 검을흑은 오직 검을뿐인 색이어서 검지 않으면 겨우 흰것만 가능한 이분법의 색이다.
玄 검을현은 검다는 의미만 있지 않다. 오묘하고, 심오하고, 깊고, 고요하고, 아득하고, 크고, 통하고, 빛나고, 북쪽이고, 혼돈이기도 한 검음이다. 그리고 이 검을현 두자가 겹쳐 나온 玆 검을자이니 그 뜻이 두배로 더해지는 의미이겠다.
天地玄黃,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어릴적 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다 깨우치진 못했어도 이 네 글자의 음만은 수백 번도 더 따라 소리내며 외웠다. '하늘이 검고 땅이 누렇다'라는 뜻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검은색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본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천지현황'에서 이야기하는 본래 검은 것은 땅속의 흑연이나 숯의 검음이 아니라 깜깜한 밤하늘의 검은 색이다. 검지만 모든 별들과 성운과 은하의 색깔을 품고 있는 검은 색이니 우주에서 가장 밝은 색은 어쩌면 흰색이 아니라 玄 검을현의 검은색일지도 모르겠다.
조정에서 정약용보다 정약전이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은, 그리하여 그를 땅끝마을 강진이 아니라 두번다시 보지 않을 요량으로 바다건너 흑산도 오지로 유배를 보낸 것은, 정약전의 위험성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동생 약용이 500권을 넘겨 수많은 유배저술에서 논한 것이 당시 세상 안에서의 현명한 처신과 바른 삶의 방향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형 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포함해 겨우 몇권만 남기고 '흑산어보'가 아닌 '자산어보'로 표기한 것으로 힘겨운 백성의 삶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통째로 바꾸고자 한 심중이 엿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추측이다.
성리학으로 세상에 정점에 섰던 그가 서학으로 인해 세상 가장 낮은 곳 섬마을로 들어가고 또 살아가면서 흑산도를 자산도로 만들어 간다. 누구나 육지로 떠나고 도망가고 싶어하는 암흑과 절망의 섬 <흑산>에서, 스스로의 삶으로 백성이 한 줌 희망을 품게 하여 마침내 육지에서 도리어 희망을 잃은 사람조차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 <자산>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크게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은, 세상에 타협 못한 실패한 실학자의 삶이 처연해서가 아니라 19세기 초 조용히 세상의 변화를 꿈꾼 조선의 어느 혁명가 革命家의 깊고 짙은 사랑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창대가 돌아가는 배위에서 검은색의 섬, 흑산黑山은 드디어 총천연색의 섬, 자산玆山으로 색깔을 바꾼다. 어쩌면 육지를 버리고 섬으로 기어코 들어가 살고자 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조용히 꾸는 사람들이 아닐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