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부터 그는 지각이었다. 자기가 늦어놓고도 심사가 불편해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기사님들 사이에 혼자 멀쑥한 세미정장에 갈색 신사화를 신고 왔다. 자기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듯한 차림이었다.
7년 정도 연주하지 않고 거실에 두었던 피아노였다. 이 정도 상태면 갖다 버리는 게 낫겠다고 할때 모욕적인 느낌을 받았다. 음악 한다면서 피아노를 어떻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냐는 의미가 말 속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고치려면 비싸다고 해서 얼마냐고 물어봤고 27만원이 추가되어서 운반까지 총 52만원이 든다고 했다. 예상못한 가격에 심장이 아렸지만 기싸움에서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어린시절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거라 아무리 돈이 들어도 꼭 고쳐야했다. 주춤하면 말이 더 길어질 것 같아 바로 '수리해주세요' 했다. 본인도 음악하는 사람인데 악기를 버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면 음악에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많이 쌓인 사람인가 싶었다.
사실 운반할 때부터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기사님이 몰고 온 트럭 짐칸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를 피아노 두 대가 실려 있었다. 내 피아노를 싣느라 다른 피아노들을 이리 저리 밀어 자리를 만들었다. 10분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문의전화가 두 번 왔다. 모두 피아노를 처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님이 전화기 소리를 크게 해놓고 계셔서 통화하는 목소리가 잘 들렸다. 건너편에서 처음엔 운반비를 묻고, 다음은 폐기하는 비용을 물었다. 요즘에는 리얼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예전보다 줄다보니 중고로 판매하는 것보다 버리는 게 비용적으로 더 나은 모양이었다. 아직 고치면 쓸 수 있는 피아노들이 황량한 공터에 모여 박살나는 이미지가 떠올라 슬펐다.
조율사가 되려면 음감이 뛰어나야 할 것 같다. 만나본 조율사분들은 다들 피아노도 잘 치시더라. 아마 그 중엔 음악 전공자도 있을 것이다. 해외유학파도 있으시려나. 처음엔 부푼마음으로 시작했겠지만 생업으로 음악을 하면서 좋지 않은 모습도 많이 봤을 것이다. 무시 당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름다운 일을 업으로 삼고 인상 찌푸리고 사는 건 좀 안타깝다.
조율사 선생님이 자꾸 투덜투덜하기에,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피아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럼 추억이 있는 피아노네 그런데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되지 했다. ‘추억’이라는 단어를 그 분 입에서 들으니 찝찝하면서도 이 분도 감성이 있으시겠구나 싶어 짠했다. 2시간 정도 걸려서 수리가 끝났다. 리얼 피아노를 오랜만에 치니까 기분이 좋아서 노래도 바로 하나 썼다. 사진찍어 동네방네 자랑도 했다.
그렇게 기뻐했는데 한 달 만에 조율이 다 풀렸다.
조율이 풀렸다는 사실은 희진이 연습하러 왔다가 알려줬다. 기타는 자주치니까 조율 틀어진 걸 금방 알겠는데 피아노는 아직 느낌을 모르겠다. 희진은 운반만 하고 조율을 안했나보다고 생각했단다.
희진이 대신 전화를 걸어주었다. 수리한지 한 달도 안됐는데 다 풀렸네요. AS되지요? 당당하게 말했다. 기분 나쁜 기색이었다고 했다. 희진은 조율사님이 왔다간지 얼마 안되면 잠깐 들러 조율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희진이 아는 조율사분께 전화하니까 오래 안쳤던 피아노는 한번에 조율이 안되고 2-3번 해야한다고. 그리고 내가 낸 돈은 그랜드피아노 기준이라고 했다. 어쩐지 느낌 이상하더라니...분하다...! 희진이가 거래하는 조율사분을 부를까 어쩔까 생각하다 시간이 지나갔다.
며칠 뒤 학교 수업 쉬는시간에 조율사님이 먼저 연락왔다. 추가비용 있냐고 여쭤보니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퍼플문 옆 주차장은 전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둥 과장이 심했다. 골목 들어가면 공영주차장 있다고 말하니 조율가방 들고 이동하기 멀다고 또 투덜투덜. 제가 들어드릴까요? 하려다가 사실 공영주차장이 그렇게 크게 먼 거리가 아닌데, 그냥 투덜거리고 싶으신가 싶었다. 싸워서 좋을 일 없으니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날 작업실 도착하셔서 ‘시간 맞춰서 왔죠?’ 했다. 사실 5분 늦으셨는데 지난번을 생각하면 나름 신경쓰신 셈이다. 전화로는 짜증내더니만 막상 만나서는 싱글벙글했다. 좋은 일 있으신가? 아니면 희진이랑 전화통화하며 전공자니까 잘보여야겠다 싶었나. 나는 돈 더 내야할까봐 걱정했던 게 좀 민망해져서 ‘커피 드실래요?’하고 부엌으로 쏙 들어갔다. 익숙하게 피아노 뚜껑을 열고 작업에 들어갔다. 조율기 틀어보니 소리가 다 틀어져 있었다.
지켜보고 있어야 신경쓰실 것 같아서 옆에 있다가, 집중 안되실까봐 방에 들어갔다가 왔다갔다했다. 어제 전화통화를 기억하셨는지 ‘어느 학교 나가세요?’물었다. 길면 말꼬리 잡힐 것 같아 '초등학교 나가요.' 라고만 짧게 답했다. 40분 정도 조율을 마치고 아까 내놓아서 이미 식은 커피를 홀짝 드셨다. 저번에도 그랬다. 작업하는 동안엔 커피를 손도 안대시더니 마치고 홀짝. 실내화도 필요없다고 하시더만 그래도 내 드리니까 신으셨다. 커피를 마시고 싶기보단 존중을 원하셨던 것 같다.
갈색 신사화를 신으시는 걸 바라보며 환송했다. 아마 다시 뵐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앞으론 싱글벙글할 일이 많으시길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