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람이는 서울에 사는 영화감독이다. 우리는 일년에 두 세번 서울이나 부산, 그 중간 어디에서 만난다. 하동과 구례를 좋아해 매년 들르는 그녀를 보러 하동에 다녀왔다.
월요일 하루 학교에 휴가를 내고 가면서도 화요일 수업 준비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이렇게 시간을 쪼개어 가는 게 맞나 싶었다. 터미널 앞 다이소에 들러서 수업에 필요한 탁구공을 구입하고 버스를 탔다.
도착할 때가 다 되어 눈을 뜨니 창 밖에 배꽃이 가득했다. 도시의 풍경은 지나가고 낮고 조용한 풍경이 시작됐다. 터미널에 마중나온 소람이는 동네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서 한 번에 못 알아봤다. 서울에서 버스로 싣고 왔다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근처에서 두부정식을 먹고 십리 벚꽃길을 쭉 걸었다. 수요일에 온 비로 꽃이 많이 떨어져 발 닿는 곳마다 꽃길이었다. 주말을 맞아 커플들이 예쁜 모습을 서로 찍어주고 있었다.
숙소 들어가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사가자고 편의점을 찾았는데 소람이 왈 가게 문이 여덟시면 닫는단다. 도시사람 표낸다고 놀렸다. 벚꽃길을 벗어나 숙소까지 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흐릿했다. 관광객들은 빠지고 교통 지도하는 분들이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쉬고 계셨다. 운 좋게 아직 한 가게가 불을 켜놓고 있었다. 냉장고엔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꺼냈는지 모를 정도로 꽁꽁 얼어있는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과자 하나 골라서 먹으면서 또 걸었다.
숙소에 와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낮에 했던 걱정들은 잊고 깊이 잠들었다.
다음 날 숙소 근처 정금차밭으로 아침 산책을 나섰다. 걷고 또 걷고. 주변은 밭, 꽃, 나무들로 둘러싸였다. 이름도 모르지만 꽃 피고 잎사귀 돋는 모습을 지금 아니면 또 언제볼까 싶어 유심히 들여다봤다. 사진 찍는 것 하나에 너무 재밌어서 깔깔거리며 즐겁게 걸었다.
점심 먹고 찻집에 들렀다. 주변에 인스타에 올리기 좋은 세련된 카페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조금 특별한 곳을 찾았다. 소람이 작년에 한 번 들렀던 곳인데 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사장님이 인생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둘이 가니까 이번엔 저번만큼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골이라 젊은 사람 보면 반가워서 이야기를 자꾸 붙이시는 어르신이 계시는 건가.
문을 여니 갓 목욕하고 나온 사람처럼 뽀얀얼굴의 중년 남자분이 나오셨다.
“알아서 드실 수 있나요? 아니면 제가 맛있게 마시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찻집은 천으로 구획지어 손님 공간과 사무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우리끼리 마신다고 해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듯 대화 내용이 다 공유될 것 같았다. 들어가기 전에 소람이가 한 말의 의미가 바로 이해되었다.
사장님은 소람이를 알아보셨다.
“또 오셨네요~ 영화 만드는 분이시죠~”
“네~오랜만에 왔는데 기억 하시네요?”
“손님이 많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초면에 웃어도 될지 안 될지 모를 농담을 던지시곤 수상한 초록색 물병을 꺼냈다.
"다산 정약용께서 돌 사이로 나온 지하수로 차를 우려내야 맛이 좋다고 했습니다."
물병 뚜껑을 열고 포트에 물을 부었다. 물이 끓는 동안 익숙하게 다기를 세팅하고 세 사람 앞에 놓인 잔에 우려낸 차를 따라주었다.
"첫 잔은 한 번에 마시세요. 물이 뜨거워도 호로록 마시면 혀가 안 디입니다."
(*디이다 : 데이다 의 경상도 사투리)
한복을 입어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의 사장님은 캐쥬얼한 자캣에 세련된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그 부조화가 그의 개성을 완성했다. 자신을 차 파는 사람으로 소개한 사장님은 차와 건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주변에 밭농사 짓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이에서 차의 효능과 좋은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콘트롤타워'역할을 하고 있다 했다.
이어 사장님의 차 사랑을 보여주는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셨다. 차 생활에 매료되어 주변에 권하기 시작할 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는데, 몸이 아프게 되니 그제야 차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했다. 또 몇 년 전에 찻집에 방문했던 한 유명인이 암에 걸린 소식을 들었다며, 차를 마셨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괜히 먼 시골로 요양 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낸 후에 어떤 질문이든 해보라고 했다. 돈 많이 버는 일은 못 해봤으니 그것 빼고는 모두 답해주겠다고 했다. 나도 어느새 사장님의 이야기에 심취해 각종 건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뻑뻑해서 눈물약을 넣고 하루를 시작하는데 나아지는 방법이 있나요?"
"신맛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달거나 짠 음식만 먹고 신맛은 잘 안 먹는 거 같은데. 아침에 일어나 좋은 식초를 마셔보면 나아집니다. 물론 차를 마시면 한 번에 해결이 됩니다."
내친 김에 종이와 펜까지 내와 천,지,인 을 적고 그에 해당하는 신체 기관도 써내려갔다. 계속 차를 내주시니까 둘이 돌아가면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사장님은 몸속에 노폐물이 많이 쌓여서 그렇다고 했다. 좋은 차가 들어가니 나쁜 것이 배출되는 것이고, 자기는 평소에 차를 많이 마셔서 괜찮다고 했다.
사장님 말씀 때문인지, 정말 효험이 있는 것인지 차를 마시다보니 피곤했던 기운이 점점 돌아왔다. 우리가 한 잔 마실 때마다 사장님도 한 잔 하고. 우리보다 사장님이 더 즐거워 보였다.
우리 둘 건강 상태가 어떤 것 같냐고 물으니 둘 다 온전히 건강해 보이진 않는다 했다. 소람이는 저번에 만났을 때보단 좋아보이는데 움츠러들어 있어소화기관이 좋지 않을 것 같고, 나는 너무 의욕을 부리느라 지쳐보인다고 했다. 눈이 건조한 것 외에도 기관지가 좋지 않은 것, 피곤하면 이명이 생기는 것 등 걱정거리를 상담했는데 얘기하다보니 내 몸에 안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았다.
"현악기의 줄이 팽팽하게 조여있으면 악기가 상하지요. 사용하지 않을 땐 풀어놓습니다. 사람도 아침에 일어나 차 한 잔 하면서 기운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집중해서 일하고 나면 틈틈이 휴식하며 긴장을 풀어줘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말고 멍하게 있는 게 도움됩니다. 낮에는 차 마셔서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하고, 저녁엔 술을 마셔 템포를 늦춰주세요."
요즘 왜 새로운 걸 할 의욕이 안 생기고 무기력한가 답답했는데 사장님과 대화에서 불현듯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휴식에 대해 너무 야박했다. 낮잠 자거나 핸드폰 만지작 거리며 멍하게 있다가도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 내려놓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평소에 아무것도 안하고 대기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 약속 시간에도 딱 맞춰서 도착하는 편이다. 급하게 도착하면 정신이 없어서 물건을 빠뜨리거나 물을 쏟는 등 자잘한 실수가 자주 생긴다. 준비하다 조금 집중을 놓치면 약속에 늦을 때도 많다. 미리 미리 쉬지 않으니까 중요한 순간에 몸이 마음과 다르게 파업을 했던 것이다.
일할 때는 또 어떤가. 지칠때까지 몰아치다가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도 기운이 없어 한동안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가 많다.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게 이 뜻이었구나. 남들 일하는 것 보면 나는 꽤 많이 쉬는데도 늘 피곤해서 왜 그런가 했는데. 그냥 휴식을 많이 취해야만 하는 사람인가보다. 여행가는 길에 이틀 뒤 수업 생각을 할 정도니. 왜 무기력한가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몸보다 마음이 앞서가고 있었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하는데, 휴식에 대해 이렇게 오래 이야기 나눠본 적은 처음이었다. 차 마시러 왔는지, 사주풀이 카페에 왔는지, 술자리 합석했는지 모를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여러 조언을 들었지만 마지막엔 이러저러해도 다 차로 해결된다고 했다. 이명 때문에 커피를 끊고 있는데 이 김에 차로 갈아타기로 했다. 사장님이 파는 12년산 유기농 발효차는 너무 비싸서 사 오진 못했다. 차를 안 산다고 섭섭해하지는 않고 웃으며 환송해주셨다.
사상 터미널에서 시내 버스로 갈아타고 오는 길은 열시가 넘었는데도 가게마다 불이 다 켜져있었다. 마음이 헛헛해서 편의점에서 감자칩이라도 사먹고 싶었다. 하동에서 채운 풍요로운 마음을 인스턴트로 되돌릴 순 없다고 과자를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다가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하동을 들르면 또 한 번 괴짜 사장님이 있는 그 찻집에 방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