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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Apr 03. 2024

다시 0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자신감

내년에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해서 여유자금이 필요하다. 작곡 프로그램이나 우쿨렐레 프로그램을 열어볼까 했는데, 새로 일을 만들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일을 못 만들면 나를 써줄 고용인을 찾아야 하는데...학교나 기관을 알아봐도 마음 먹은대로 금방 일이 구해지지 않아서 당근마켓에서 알바코너를 뒤졌다. 요즘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아르바이트 해본 지도 오래되어 생각대로 일이 구해질까 걱정이었다. 몇 군데 알아본 후 다행히 집에서 20여분 거리의 빵집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세시간 바짝 일하는데 오후에 학교 가거나 음악작업하는 데에도 부담없다. 평소엔 집에서 빈둥대다 10시쯤 작업실에 도착하는데 알바 덕분에 하루의 시작이 빨라졌다. 


최저 임금을 받는 단순노무는 20대 이후 처음 해본다. 그 동안 시급이 높은 일거리, 남들과 대체되기 어려운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피했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때 했던 아르바이트를 다시하는 게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렇지만 일 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고 음악도 있고, 기획도 있고 멋있는 일을 할 기회는 많다. 돈 필요해서 하는 일인데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


사장님께는 비밀인데 나는 그전에 빵집에서 일하다가 짤린 역사가 있다. 탕비실에서 알바생들과 사장님 뒷담화를 하다가 들켰고, 며칠 뒤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하는 통보를 들었다. 그때는 별 충격도 없었다. 돈 버는 일을 경시했던 것 같다. 돈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하면서 경제관념이 별로 없었는데, 물욕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학비도 대주셔서 그랬던 것 같다. 알바는 그냥 스쳐가는 일인데 내가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까. 동네 빵집 사장님보다 앞으로 사회적으로 내가 더 유능한 사람이 될텐데 크게 배울 게 있을까. 하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20대의 나는 매출을 어떻게 하면 늘릴까-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만들까- 고민하며 사장님에게 의견을 많이 냈다. 풋내기의 의견은 크게 반영이 되지 않았고 점점 흥미를 잃었다. 의욕을 갖는 것은 좋지만 어차피 내 사업장도 아니고, 기본적인 것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런 의견을 내는 게 자리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다. (일을 잘 했는지 못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짤린 걸 보면 아마 엉성했을 것이다) 그때는 일 자체를 잘하려고 하기보다 일을 통해 뭔가를 얻고자 하는 내가 더 중심에 있었다. 


꿈이 참 컸던 20대의 나. 10년 뒤에 다시 알바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동안 사회생활하며 우여곡절을 겪은 지금은 일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달라졌다. 면접을 가서도 크게 어필하려고 하지 않고 사장님이 필요한 사람 구하시길 바라요 라는 느낌으로 대화했고, 일을 시작해서도 크게 주장하기보다는 시키는 일을 잘하려고 했다. 이틀 간 일년 반 경력의 H씨가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그녀는 어떤 일 한 단락을 마칠 때마다 '오케이~'하며 흥을 돋구며 쾌활하게 일했다. 나는 그녀의 오케이를 받을 만큼 잘하지 못했지만 도움이 되기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보조했다. 빵 컨테이너를 바깥으로 나르고, 케이크 상자를 펼쳐서 제자리에 정리하며 내 역할을 잘 한다는 것이 뿌듯했다. 


오늘은 H씨 없이 사장님과 둘이 근무했다. 10분 일찍 도착해서 음악켜고, 조명켜고, 재고 정리를 했다. 나머지 시간은 빵 포장과 마무리 정리. 업무 순서대로 따라가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가능하고, 빵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은 다양한 신체부위의 협응이 필요한 복잡한 일이다. 누구나 숙련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해진 시간 내에 다 해내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세 시간 동안 잠시 핸드폰 확인할 여유도 없지만 정신없이 포장한 후 진열대에 가득차 있는 빵들을 보면 오늘의 할 일을 잘 마쳤구나 하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마음 속으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으며 퇴근했다.


지금 마음이라면 앞으로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다시 0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배워야할 것이 많고, 새로운 곳에선 언제나 초보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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