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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모드 Apr 15. 2022

자존감과 자존심에 대하여

내 안의 두 녀석은 오늘도 열심히 시소를 타는 중


P 모 회사의 파이널 면접에서 있었던 일이다.


본부장: "제가 규선씨랑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본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나: (5초 정도의 짧은 고민 뒤) "음...돌아이?"

본부장: "하하하 재미있네. 나는 그런 생각 전혀 안했어요. 자아가 단단하고 매력적인 친구라 생각했지."

나: "제 매력은 세 번 정도 만나야 본격적으로 파악하실 수 있으신데 첫 만남에 알아보시다니 대단하시네요!"

본부장: "야~ 너 맘에 든다!"


'아니 대체 면접을 보면서 이런 말도 안되는 답변을 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면접장 안에 계신 분도 집에서 빤쓰만 입고 코파면서 TV 볼 거야.' 라고 마인드컨트롤을 하니, 그냥 이웃집 아저씨같이 편안한 느낌을 받아 평소의 나답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실제로 이웃집에 어떤 아저씨가 사는지는 모른다.)




나는 자존감이 꽤 높은 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나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으며,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 그 동안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혼낼 때는 세상 가장 무섭지만 평소에는 항상 '우리 딸 최고!'를 외쳐주시는 부모님과 크고 작은 고민들을 기꺼이 털어놔주는 친구들, 개그 욕심이 있는 나에게 '니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라고 말해주는 회사 동기, '넌 특이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야.'라고 얘기하는 대학 동기, '언니는 이것저것 찔끔찔끔 잘하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다 잘하는 거에요.'라며 엄지를 들어올려 주는 친한 동생까지! 쓰다보니 내 주변에는 참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내 자존감은 단단하지만 딱딱하지는 않은 나의 자아와 나를 둘러싼 좋은 사람들로부터 켜켜이 쌓이고 높아졌다.




높은 자존감과 더불어 자존심도 센 편이다. 지금은 승부욕이 많이 떨어졌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체육 시간 제외) 물론 '뜨거운 논쟁을 즐기는 변론가'인 ENTP다운 면모를 보이며, 지금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싸워 이기려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는 편이다. 이해하고 받아주고 수용하는 것과 자존심이 상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무튼, 평소 high self-esteem 상태인 내가 유일하게 무너지는 상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애'. 나는 유독 연애라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평정심을 잃고 high와 low를 오가는 거친 파도와 같은 위험한 존재가 되곤 한다. '니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고 일단 내 맘은 이래. 선택과 고민은 너의 몫이야.'라고 생각하며 쿨하게 마음을 표현하다가도, 그와 나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니가 감히....!!!!!???'라며 부글부글 상태가 되었다가, '내가 그렇지 뭐...누가 나를 좋아하겠어...'라며 파들파들 몸을 떨며 슬퍼하는 의기소침 상태가 되기도 한다. 수십차례의 부글부글과 파들파들을 넘나드는 동안 나의 자존감은 지구 핵까지 떨어지기도 하고, 우주까지 팽창하기도 하며, 볼펜 똥만큼 작아지기도 한다. 유부녀 친구들은 이런 나의, 여전히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감정을 부러워하며 '여기 아주 드라마 맛집이구만!'이라고 눈을 반짝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이러한 폭풍같은 감정의 변화가 무섭고도 지겹다.




나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도, 유명인이 되는 것도, 권력을 지녀 여러 사람을 쥐락펴락 하는 것도 아니다.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어버릴 감정이 아닌, 아랫목같이 따뜻하고 오래가는 마음을 가진 누군가와 나의 남은 생을 평온한 맘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따뜻한 아랫목에 함께 앉아 내가 좋아하는 귤을 까먹으며, TV 속 시덥잖은 이야기들에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는 것. 그런 사람 하나 있다면, 앞으로의 내 삶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손 꼭 잡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사랑은 늘 어렵다.


내게도, 자존감과 자존심이 요동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고요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low self-esteem의 길목에서

정신 똑디 차리고

high-way로 진입 시도 중인

2022년 4월 15일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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