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수원시 평생학습관 웹진 <와>에 기고한 2월 칼럼입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 있습니다.
아래는 전문을 옮깁니다.
예비 대선주자를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에 안희정 씨가 나왔다. 아버지는 그의 옷깃에 달려있는 노란 리본 배지를 보시고는 “저걸 달고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 격한 감정을 쏟아내셨다. 일순간 마음이 울컥하면서 약간의 슬픔과 분노, 답답함 등의 감정이 올라왔다. 숨을 고르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곧 더 이상 대화를 평화롭게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 그만 침묵해버렸다.
처음 비폭력 대화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파병 논쟁이 한창이던 십 몇 년 전이다. 반전평화운동을 하던 시민단체의 워크숍에서 지나가듯 그런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진보 대 보수, 군국주의 대 반전평화 등 세상을 거대 담론의 틀에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 탓에 대화의 기술처럼 들리는 ‘비폭력 대화’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야들야들하고 낯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10년여가 지나, 작년 여름 나는 한국비폭력대화센터를 찾았다. 6주 과정의 비폭력 대화 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때였다. 연애 시절부터 시작해서 흔히들 상대의 밑바닥을 본다는 결혼 준비 기간에도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았던 ‘우리’였는데, 그런 아내를 보는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았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잔인하다 싶을 때가 많았다. 그저 낯간지러운 테크닉 정도로 치부했던 비폭력 대화의 필요성이 개인적 삶에 훅하고 들어왔다.
그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아내와 나의 관계는 회복 이상으로 나아졌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이 사회는 달랐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모이는 두 그룹은 서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웅진지식하우스,2014)에서 미국의 Two Nation 문제를 다룬다. “미국이 어떻게 하나의 나라냐”라는 말이 있다. 미국은 사실상 민주당의 나라와 공화당의 나라, 두 개의 나라라는 것이다. 정확히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비폭력 대화를 만든, 아니 정확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미 구사해 온 비폭력적 대화법을 정리한 마셜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한국NVC센터,2011)에서 노란 리본과 태극기 사이의 대화를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비폭력 대화의 구성 요소는 네 가지다. 관찰, 느낌, 욕구, 부탁.
말은 쉽지만 실제로 참가했던 비폭력 대화 워크숍에서 나는 관찰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몸소 느꼈다. 비폭력 대화에서 말하는 관찰은 판단·평가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관찰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시로 지각하는 직원이 있다면 상사는 뭐라고 말할까?
요즘 자주 늦네.
이 정도면 자상한 표현이다. “맨날 늦는 거 아냐!” 정도가 흔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전형적인 ‘판단’에 들어간다. ‘자주’와 ‘맨날’ 때문이다. 이것이 관찰이 되려면 “이번 일주일 동안 3번 지각했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게 어색한 것을 안다. 그 어색함만큼 관찰이 아닌 판단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연인, 부부 사이의 싸움에서 흔히 등장하는 ‘한 번도’라는 말도 전형적인 판단이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어!”
판단이 아닌 관찰은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겨우 익혀진다. 왜일까? 그건 성찰 없는 습관적 말에는 비난의 의도가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넌 도대체 언제 공부할래?”라는 말은 자녀에게 공부하고 있지 않는 상황을 알려주고, 이제 함께 건설적인 계획을 세워보자는 의도가 아니다. 책은 안 보고 매일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아이에 대한 분노와 섭섭함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일 뿐이다.
로젠버그의 책과 워크숍에서 배운 관찰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상대와 내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는 것이 관찰이고, 그 이외의 것은 다 판단이다. “어제 내가 3번 카톡했는데, 답이 없더라.”라는 말은 상대가 기분 좋게 듣든 아니든 분명 관찰이다. 하지만 “넌 내 연락이 우습지?” 혹은 “도대체 연락을 받는 적이 없냐!”라고 하면 판단인 것이다.
관찰이 판단과 다른 것처럼, 느낌은 생각과 다르다. “나는 오해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와 “나는 네가 나를 오해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다른 표현이다. 전자의 표현에는 상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후자의 표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걱정스럽다는 그 사람의 고유한 느낌을 뭐라 반박하겠나?
비폭력 대화에서 느낌은 욕구를 드러내는 신호(sign)이다. 즉, 모든 인간은 어떤 욕구에 기초해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 ‘걱정스럽다’는 공존, 화합, 평화로운 관계 등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을 때의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위의 느낌 표현을 “나는 너와 친밀한 관계이고 싶은데, 네가 나를 오해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이는 나의 염려의 감정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분명히 알게 된다.
관찰이 판단과 달리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낌도 생각과 달리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욕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생각과 목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느낌과 욕구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기에 공감이 가능하다는 인간관에 기초해있다.
노란 리본에 대한 감정 충돌 이후 『비폭력 대화』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상사로서의 지난 시절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불평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프로젝트 지시에 대해 후배 직원이 이런 저런 어려운 상황들을 얘기할 때면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말고, 되게 하는 방법이 뭔지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었다. 꽤 버거운 일도 기어이 해냈다는 자부심이 컸던 탓인지, 나는 후배의 그 말 뒤에 차마 드러내지 못한 ‘느낌’이 무엇이고 ‘욕구’가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그들은 나의 당당함 앞에서 얼마나 소외되었을까...
공감을 어렵게 하는 이유, 상대의 느낌과 욕구에 반응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다. 공감은 상황 속에 ‘머문다’는 것이다. 로젠버그의 비유가 참 와 닿는다.
마술쇼
- 마셜 로젠버그 -
서핑해본 적 있으세요?
지금 보드를 타고 나가서 큰 파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자, 그 에너지에 휩쓸려갈 준비를 하세요.
자, 여기 옵니다!
지금 그 에너지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공감입니다.
(후략)
대화는 감정의 물결이다. 그리고 상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다.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상대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파도를 타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공존의 다른 이름이다.
상대를 나의 사고의 틀 속에 맞춰버리든, 상대의 부탁 앞에 나를 숨겨버리든 하는 것은 ‘빠른’ 해결책이다.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비난도, 나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책도 ‘빠른’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머물겠다.’라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시콜콜 감정 얘기를 듣는 ‘시간 낭비’ 대신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공감은 포기해야 한다.
어버이연합을 필두로 하는 어르신 세대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어떤 다큐 감독이 그분들을 이해해보려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인터뷰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지금 어르신 세대는 청년기에 새마을운동을 경험했는데, 바로 그 새마을운동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이분들을 나라를 힘차게 세워 올리는 주역으로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엘리트만 주역이던 역사의 무대에서 처음으로 주체로, 주역으로 대접받아본 경험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어르신 세대의 깊은 향수와 현 정권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런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의 행동을 두둔할 마음은 없지만, 뉴스와 거리에서 마주칠 때면 답답했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는지? 무엇을 바라시는 것인지? 그분들을 알바 부대나 정신 나간 사람들로 치부하면서 공감의 대지에서 몰아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편치는 않다. 그렇게 한 존재를 밀어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공감이라는 이름의 비폭력 대화가 필요한 시간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인간에 대한 공감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 자신이 아이히만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