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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동준 Apr 05. 2017

우리의 아픔인가, 타인의 아픔인가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실이 필요하다고 한다. 진실, 성실, 절실

                                                                       -  2017년 3월 29일, 후배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중에서          



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운동권으로 대학생 시절을 보낸 나는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만났다.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등. 데모에는 누구보다 열심히였지만, 투쟁의 현장에 자신을 깊이 밀어 넣을수록 괴리감은 커졌다. 아무래도 나는 여성에게 가해진 차별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이 나의 생존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연대를 위한 공감보다 연대의 의무가 먼저 주어졌다는 순서가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지면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절실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 존재이고 싶었다.          



타인의 고통에 왜 연대해야 하는가?     


세월호가 인양된다는 뉴스를 보면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왜 연대해야 하는가?


3월 23일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인양 중인 세월호 <출처 : 중앙일보>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몇몇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입시경쟁자가 줄었다.”는 말을 했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타인의 고통이 불러오는 마/땅/한/ 연민, 혹은 공감의 정서는 무력하다. 어떤 사건 앞에서 모두가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 그러하기에 ‘보편적 감정’이라는 무력한 호소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은 “우리가 속한 이야기”를 보라고 권하다. 쉽게 말해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듯하지만 어쩐지 익숙하다. 노동자, 농민, 빈민들과의 연대를 위한 예비 단계에서 나는 역사, 정치경제학, 철학을 학습했다. 내가 속한 이야기, 바로 계급과 역사를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물이 너무 무거워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이들 앞에서도 “6억을 받지 않았느냐!”며 호통을 치는 사람들을 차분히 자리에 앉히고 강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샌델의 처방은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사적 이야기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민교육이 담당해야 할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에서 샌델의 말은 아무래도 엘리트적 처방으로 느껴진다. 결국,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타인의 고통에 왜 연대해야 하는가?




/그녀는 착한 사람이었다.     


고통받는 이들이 착한 존재가 아니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면서 뉴스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면면을 상기시켜주었다. 참 좋은 선생님, 참 착한 딸, 참 좋은 남편, 참 살가운 아들 등등.             



2002년 신효순 심미선 사건 촛불집회 <출처 : 블로그 빈센트의 창작 BOX>

  

2002년 심미선, 신효순 학생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광화문 거리에 대형 간판만 한 두 사람의 영정이 행진하는 가운데, 평범했을 두 사람은 성녀(聖女)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은 이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미덕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는 말할 수 없는 망자(亡者)의 삶이 언론과 정치 속에서 널을 뛰고 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     


선악을 떠나서, 타인의 고통에 왜 연대해야 하는지 고민한 이들이 많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계약설도 그러한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종교도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불자는 모든 것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세계관 속에서 연대의 이유를 찾는다. 크리스천은 모든 존재가 잠재적으로 신의 사랑 안에 있다는 보편성 속에서 연대의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모두가 철학자가 되고, 모두가 종교인이 될 수는 없다.        



  

아픔은 냄새와 소리를 가지고 있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중략)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타인의 고통』 P.122)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삶이 재현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구체적 아픔이 추상적 연민이 되어버리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사진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날카롭게 비평한 그녀의 말은 옳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아픔은 눈보다 귀에서 더 생생하다. 엉엉 우는 소리는 사진 속의 아픔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순식간에 매워 버린다. 아픔에는 청각과 함께 후각도 있다. 가난의 냄새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삶은 주거환경의 복합적 요소에 대한 인지적 확인보다 가난의 냄새를 통해 한꺼번에 다가온다. 빈곤과 부의 차이는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코에 느껴지는 공기가 말해준다.     


하지만, 아픔은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마땅한 감정도, 건강한 시민의식도, 철학도, 종교도, 고통의 재현도, 모두 부분적인 이유들이다. 결국 손택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 P.184)               

아침 밤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필연성의 부재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쉽사리 이 질문을 던져버릴 수 없었던 것은 대한문과 광화문이 공존하고, 팽목항과 삼성동이 공존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다른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리 다른 정당을 지지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연대해야 할 이유, 그것 하나에서 만큼은 공동의 필연성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혹은 그것을 찾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내가 사는 이 사회가 풀썩 주저앉을 듯한 위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더 나은 이유가 있는가?      


답을 찾을까 하는 희망으로 펼쳐 든 책에서 답 대신 숙제만을 얻은 듯하다. 특별히 다음의 문장 때문에.     

당면한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고통』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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