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을 생각하며
수원시 평생학습관 웹진 <와>에 기고한 5월 칼럼입니다. 칼럼 쓴 이후 처음으로 전공과 관련된 주제로 글을 쓴 것 같네요. 이제 슬슬 밑천도 떨어져가는데... 하반기 칼럼은 어찌 가야할지 고민이네요...쿨럭...
[원문 URL http://www.wasuwon.net/118165]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인성 교육과 창의성 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은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작년 1월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노동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했을 때, 국내에서 대중들의 반응은 ‘우려’ 정도였다. 그런데 두 달 뒤 인간 대표 이세돌이 기계 대표 알파고에게 패하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공포’로 변했다. 아무래도 학자의 이론적 얘기는 맨송맨송하게 들렸지만, 최우수 대표 선수의 실제 패배는 인간 전체의 패배로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교육 분야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대략 다음 중 하나로 수렴한다.
• 인공지능과의 대결에서 인간이 이길 수 없으니,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인 인성 교육이나 창의성 교육을 하자.
• 인공지능이 정보의 기억 및 분석 등을 상당한 정도로 수행해줄 테니, 인간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인간의 고등정신을 펼칠 수 있는 창의성 교육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직업의 양분화가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사회적 생존을 모색할 수 있는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첫 번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은 결론은 같은데, 그것을 말하는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앞의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뒤의 것은 기대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낸다. 상대적으로 앞의 느낌에 해당하는 주장이 많은 것 같다.
세 번째 주장은 앞의 두 주장에 비해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주장이 모두 함께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인간지능(human intelligence)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구글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과거에 기계에게 학습을 시키는 방식은 이러했다.
1. 컵(cup)이라는 이름(label)이 붙은 이미지를 수만 장 보여준다.
2. 컵의 표상(representation)을 만들어내도록 한다.
3. 무작위로 제시된 이미지들 중에서 컵에 해당하는 것을 골라내도록 한다.
그런데 2012년 구글은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에 기반한 인공지능에게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그냥 Youtube 동영상을 1주일 정도 시청(?)하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공지능은 자신이 본(?) 동영상에서 유사한 이미지 패턴을 인식하였고,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냈다. 바로 구글의 고양이다.
위의 두 이미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놀라운 것은 기계가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세계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 수준의 비지도학습(unsupervised learning)을 해낸 것이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해서 구축한 구글의 고양이 이미지가 인간의 고양이 이미지와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인공지능은 과거와 비교할 때, 혹은 학습 능력이 없는 다른 기계들과 비교할 때, 놀랍게 발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지능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1997년 체스 월드 챔피언 게리 가스파로프(Garry Kasparov)는 IBM 딥블루와의 체스 대결에서 2승3무1패의 성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기계보다 뛰어난 체스 선수는 나오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체스 월드 챔피언은 누구일까? 딥블루? 알파고? 다른 인공지능? 이미 인간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기계도 아니다.
현재 체스 월드 챔피언은 인간-기계 연합팀이다. 가스파로프의 패배 이후 프리스타일 체스 리그가 생겨났다. 이 리그에서는 ‘인간 + 인간’, ‘인간 + 기계’ 등 어떤 방식의 팀 구성도 허용한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기계 연합팀은 어떤 탁월한 인간 체스 선수보다, 어떤 최신의 체스 인공지능보다 월등한 성적으로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여기에서 던져봄직한 질문은 이렇다. 왜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가 있는데, 거기에 인간의 힘을 보탠다고 기계보다 강해질까? 월드 챔피언 체스 선수가 있고, 그 옆에 아마추어 체스 선수가 있다. 이 아마추어 체스 선수의 조언은 월드 챔피언에게 도움이 될까? 전혀 안 되거나 거의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기계 연합에서는 인간보다 탁월한 기계가 인간과의 연합을 통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또 생각해볼 것이 있다. 인간-기계 연합팀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의 조언 혹은 협력을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거부하면서 게임을 진행한다. 그런데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기계의 조언을 무슨 근거로 ‘때로는’ 거부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인간-기계 연합팀으로 다시금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던 가스파로프 본인은 인간의 전략과 기계의 전술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전략이 무엇인지, 전술과는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 자신에게 축적된 경험치로서의 전문성과 그런 전문성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다면, 개별 역량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의 조언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주목받는 인공지능 연구자인 머레이 샤나한(Murray Shanahan)은 그의 책 『The Technological Singularity』(MIT Press, 2015)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주의적 사고를 지양하라고 말한다. 매우 인간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인간일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구글의 고양이와 가스파로프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인공지능은 몇몇 영역에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기술적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가능성은 없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지능과의 대결 구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업의 구도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대결 구도라는 것은 동일한 이해관계 속에 있을 때 성립한다. 즉, 나와 네가 원하는 것은 동일한데 그것이 한정적일 때, 대결 구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인간과 동일한 방식의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대결 구도일 수 없다.
물론 인공지능을 통제하는 소수 인간의 욕망은 다른 다수 대중의 욕망과 대결 구도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 혹은 사회적 합의의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자체가 인간을 위협한다는 기술결정론적 상상을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만 할 뿐이다.
대결 구도 속에서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것의 기원은 ‘인간중심적 사고’에 있다. 즉, 인공지능을 끊임없이 ‘인간화(anthropomorphism)’의 시각 속에서 상상하고, ‘동일한 종류의 능력’을 가진 ‘엄청 쎈 놈’으로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넘어서는 것이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포스트 휴머니즘적 시각이다. 인공지능을 ‘익숙한 지능인데 엄청나게 강한 지능’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낯선 지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은 바로 이 낯선 지능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스파로프는 딥블루와의 대결 후에 “마치 외계인과 경기를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라고 했다. 정확히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다. 우리와 아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심지어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외계인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떻게 소통하고 협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비유하자면 우주적 차원의 다문화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다르고, 또 그런 영역에서 인간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분리된 역할을 맡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아래의 문장을 보자.
"If there is a meaning in life at all, then there must be a meaning in suffering. Suffering is an ineradicable part of life, even as fate and death. Without suffering and death, human life cannot be complete."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 의미가 있어야합니다. 고통은 심지어 운명과 죽음과 같은 삶의 불가분의 한 부분입니다. 고난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위의 문장은 빅토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한 문장이다. 구글 번역기는 위의 영문을 아래의 국문으로 번역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썩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번역했다. 인간은 적어도 30초는 걸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 번역자는 무용할까?
구글 번역기는 빠르게 번역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글에게 1초의 30배인 30초를 주든, 3천6백배인 1시간을 주든 번역의 결과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 번역자는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나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조사를 고쳐보고, 어조를 바꿔보고, 유사 단어들로 치환을 하면서 가장 유려한 문장으로 다듬어가는 것이다. 즉, 속도 외에 품질의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그러한 품질의 평가 기준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인간 번역자의 결과물이 더 품질이 좋은 것은 그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최종 소비자와 같은 종(species)에 속해있기 때문에 최종 소비자에게 더 친숙한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인간의 역할을 찾는 것은 앞서 말한 인간중심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차이는 차이대로 인정하고, 동시에 인간화의 필요성 자체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인성 교육과 창의성 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성 교육과 창의성 교육이 인공지능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찾은 탈출구는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문주의적 편향일 뿐이다. 오히려 낯선 지능의 출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지능의 본질을 숙고하고, 또 지능의 다양성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야 물러설 것과 취할 것을 차분하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교육은 그러한 시선 위에서 펼쳐져야 한다.
인간은 아직 한 번도 인간 수준의 지능과 마주한 적이 없다.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오직 1등만 하던 학생이 2등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감정과 비슷하다. 하지만 “1”이라는 숫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다양할 수 있다. 교육은 최소한 회피는 아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