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육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동준 Nov 04. 2021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인천 서구 평생학습관의 문화기획자 교육을 마치고


어제, 인천 서구 평생학습관에서 5회차의 지역문화콘텐츠 기획과정이 끝났다. 행정 명칭이야 어찌되었건 나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화기획"이라는 이름으로 과정을 개설하고 진행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 녹생당의 전설적 정치인 페트라 캘리(Petra Kelly)가 했던 이 말은 내가 학부생이던 시절 나름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말이기도 하다. 기억이 맞다면 90년대 대학가의 페미니즘 담론의 영향으로 몸에 대한 정치, 은폐된 삶이나 노동의 이슈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투쟁에서 가장 흔히 사용됐던 구호였을 것이다.


20년이 지나 문화기획판에서 문화기획자 교육을 하는 와중에 저 구호를 자주 소환하게 된다.


2018년엔가 부천에서 진행한 과정에서 한 참여자는 "엄마를 위한 문화기획"을 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의 문화생활이 너무 제한적인 것 같다고, 문화기획자로 살고 싶은 자기가 엄마의 문화생활 조차 좀 더 풍성하게 만들지 못하면 뭘 할 수 있겠냐 싶다고. 함께 멘토로 참여한 주성진, 김유진, 그리고 나는 너무 좋은 시도라고 격려했지만 그 친구는 그걸 하지는 못했다. 교육 과정이 거의 끝날 즈음에야 그 마음을 꺼내놓았었기 때문에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시간이 없었다. (공식적 과정 이후에 나름의 실천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내 엄마를 위한 문화기획", 이 말을 꺼내놓는데, 3~4개월 걸렸던 것 같다. 그 친구가 넘어서야했던 가장 큰 벽은 공공기관(문화재단)에서 세금으로 진행하는 공/적/인 교육에서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기획으로 만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자기검열이었다.


어제 끝이 난 인천 서구에서의 교육은 참여자 대부분 50대 여성들이었다. 과정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과정 진행 중에 여러 번 사적인 것이 그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을 자주 얘기했다. 구체적 개인의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행정은 일반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문화기획은 개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흔히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하는데, 그건 말재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도 참여할 수 있는 접속의 지점을 만들어주는 대화라고.


각자의 기획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얘기하는 마지막 수업에서 한 참여자분이 "아버지를 위한 여행"을 기획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일을 놓으신 80대 노인이시라고 한다. 연세가 있으시니 단풍이 예뻐도 계단형 데크 길을 한 참 걸어야 하는 곳은 즐길 수 없다고 한다. 식당 테라스 뷰가 좋아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여행지의 맛집이 아무리 리뷰가 많고 좋아도 이가 시원치 않은 노인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은 다르다고 한다. 그 외 인간의 생애주기가 만드는 다양한 차이로 인해 네이버 블로그 후기, 까페 정보 등이 대부분 무소용이고, 아버지와의 여행을 위해서는 언제나 맨땅에 해딩하듯 부딪혀보고 탐색해봐야 한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구체적 개인의 이야기 속에서 보편의 필요를 보았다. 혹시 싶어서 <실버 트립>, <노년 여행>, <실버 여행> 등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마땅히 참고할 후기나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검색 알고리즘의 특징이겠지만, 가장 활발한 소비층, 특히 온라인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가장 액티브한 컨슈머를 위한 정보만이 찾아질 뿐이었다. 그나마 레떼(레몬테라스)에 한 두 개의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 팁을 구하는 글이 있는 정도.


나는 그 분에게 비슷한 필요를 가진 분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까페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나중에 펀딩해서 <여든 아빠를 위한 여행 가이드북> 같은 출판 프로젝트로도 연결해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어쩌다 내가 하는 프로젝트 중 심적으로 큰 비중과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 문화기획자 교육이다. 그리고 이 교육에서 언제나 마주하는 가장 흔하고, 어렵고, 반복되는 난관이 공공성과 사적인 삶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근데 이걸 넘어서는 게 그저 교육과 설득으로 될 일은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 혹은 사적인 고민과 욕망이라 생각한 것에 대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참여를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다른 감각과 시도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된다. 문화기획자 교육이 온라인 클래스나 대규모 집합교육으로 대체될 수 없고, 함께 학습하는 사람들과의 연대, 공감, 논의, 조정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체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지한 스승 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