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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동준 Oct 14. 2024

즉흥예술을 어떻게 감상할까?

<퍼포먼스 리서치Ⅱ : POTENTIAL ENERGY> 리뷰

즉흥 예술 이전에 현대 예술을 감상할 때면 항상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이게 어떤 의미인 거지?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주변에 예술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물어보면 다들 "그냥 느끼라!"고 한다. 사실 난 이 말이 훈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가 가진 '맹시(blindsight)'의 한 예이자, 예술 감상에 관한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훈련받지 못한 예술 문외한이라도 진짜 명 연주를 들으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와 같은. 그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게 그야 말로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느껴서라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늘 하려는 얘기는 그것은 아니다.


지난 주말(24.10.12.) 수원상상캠퍼스 멀티벙커에서 즉흥예술 공연을 봤다. 예전에도 국악의 시나위나 째즈 공연 같은 즉흥성이 강조되는 공연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런 스타일의 공연에도 나름의 약속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본 공연은 그런 것 없이 그야 말로 즉흥에서 출발해서 즉흥으로 마무리하는 시도였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찐' 즉흥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연을 보면서 몇 가지 인상적인 생각과 느낌이 있었다.



#1. 신뢰


공연을 보는데 문득 이게 참 대화같다는 생각을 했다. 4명의 예술가가 함께 만드는 즉흥 퍼포먼스이니 대화라고 하는 게 당연할텐데, 내가 대화라고 느낀 것은 이것이 고도의 '예술!', '예술!' 그런 것이 아니라 그야 말로 그냥 일상의 대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대화를 잘 하려면 상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대화를 잘 하려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대화를 잘 하려면 상대에 대해 반응하기 위한 '유연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화, 혹은 관계의 지속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퍼포먼스는 정확히 이 지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타악 연주자가, 거문고 연주자가, 미술가가, 무용가가 어떤 퍼포먼스를 보일 지 미리 약속하지 않았다. 약속된 것의 완벽한 수행(이것은 환상이다.)이라면 그것은 현재적으로 살아있다기보다는 과거에 살았던 것(약속)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 예술이고, 약속에 대한 '종속'이다. 반대로 개별 퍼포머의 완전한 '자유'는 그야 말로 아노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종속은 자유와 대비하여 언뜻 부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는 '관계 없음'의 다른 말이다. 함께 만드는 - 비록 그것이 즉흥이라도 - 퍼포먼스에서 일정한 종속은 '관계 있음'의 실시간 확인이자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퍼포머들은 서로가 서로를 종속하는 동시에 서로의 자유를 위한 시공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도 내 계획이 아닌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타자(동료 예술가)의 신호에 반응하는 것(reactive)을 통해서. 


(좌) 미술가 홍보람 (우) 무용가 김바리
(좌) 타악 연주자 심운정 (우) 거문고 연주자 심은용


반응적인 예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조폭 연기만 하기로 한 배우는 열심히 조폭에 대해 연구하고 연습하면 된다. 그런데 촬영 당일에 배역이 결정된다면? 심지어 촬영 중에 본인 배역이 여러 가지로 바뀐다면? 배우는 미리 역할(캐릭터)을 연습할 수 없다. 준비할 수 없다. 그저 연기의 기본기를 재료 수준에서 잘 연마하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양한 표정을 위한 준비, 딕션을 위한 준비, 몸을 여러 형태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 등등. '나의 예술'이 아닌 '반응적 예술'을 하기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할 것은 내가 속한 장르 예술의 기본기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요리의 재료 처럼 만들어두는 것이다. 일종의 연장과 재료만 준비하는 셈이랄까? 여기에 더해 퍼포밍이 진행되는 순간 순간의 변화에 맞게 재료를 옮겨다닐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표현의 기본 단위, 그리고 유연함. 이것은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고, 그 나머지는 현장에서 발휘되는 것들인데, 그게 바로 대화에서 요구되는 관심, 이해, 신뢰이다. 상대방의 신호는 의미가 고정된 고유명사 같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 적합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 스스로에 대한 '이중의 신뢰'가 필요하다. 그/그녀의 표현 자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나의 반응이 지금 순간의 조화를 깨드리지 않는다는 믿음. 혹은 삼중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상대 자체에 대한 믿음, 그에 반응하는 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의 반응을 수용하는 상대에 대한 다시 믿음.



#2. 주종이 있을까?


퍼포먼스 초반에는 마치 음악이 '주'가 되고 그림과 안무가 '종'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한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림과 안무에 비해 음악은 공간 전체를 울리면서 전달되기 때문에 시그널(signal)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즉, 안무가는 연주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춤을 출 수 있지만, 연주자는 보이지 않는 안무가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을 끌어가는, 공간 전체에 전달될 수 있는 시그널의 주인은 연주자인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간은 반쯤 가려진 천과 실로 구획되어 있었다.


천과 실로 나뉘고 연결된 퍼포먼스 공간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사라졌다. 안무가는 분명 음악에 반응하지만 자신의 몸짓이 만드는 '연속성' 안에서 움직이기도 한다. 음악적 신호를 입력 삼아 매 순간을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신호에 반응하면서 자기 몸의 연속성이라는 맥락 안에서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연주자는 실제로 그러한 안무가를 눈으로, 혹은 직접 시선을 주지 않더라도 공간에서 전달되는 움직임의 속도나 거리감 등으로 감지하면서 반응적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림은 워낙 제한적인 공간에서 바닥에 앉아 조용히 그리는 동작으로만 이루어졌기에 다른 퍼포머들과 어떤 관계성 속에 있는지, 쌍방향적인지, 일방향적인지, 독립적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3. 시초는 무엇일까?


퍼포머들은 서로에게 반응했다. 하지만 퍼포머들끼리만 반응한 것은 아니고, 환경 자체에 반응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해보였다. 그 환경에는 공간,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는 빛, 자유롭게 이동을 허용한 관객의 움직임 등 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하나의 반응은 그 자체로 연속 선(chain reaction)을 만들면서 그 다음의 반응의 '큐'가 된다. 그렇다면 시초적인 큐는 무엇일까? 누가 그것을 만들까? 무엇에 반응하여 만들까? 연주자인가? 관객인가? 혹 그것만은 약속되어 있는 것일까?


짐작일 뿐이지만, 공연은 그러한 '시초(genesis)'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반응의 연쇄 속에서 이어지는 흐름만이 존재할 뿐, 딱히 모종의 시초를 의도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공연의 시작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공연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게 누구에게서 시작되든 무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즉, 정해진 시초라는 관념이 무의미해지는 작품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건 앞서 주종이 사라진 관계성과 이어지는 생각이기도 했다.


시초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마침'에 대한 지점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과도 이어졌다. 역시 공연이 끝나는 순간은 있었다. 그런데 그건 어떤 약속이 아니었다. "대략 1시간 정도는 자유롭게 퍼포밍을 하다가 이 장단이 6번 반복되면 그때 마치는 것으로 하자." 이런 식이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는 순간에 다가감을 느낄 때 퍼포머들은 신중하게 서로를 살폈다. 동작이, 음악이, 연주가 멈추는 듯 이어지는 시간이 옅게 지속되었다. 여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호흡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을 함부록 싹뚝 잘라내는 무례함을 피하기라도 하듯, 퍼포머들은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래서 그 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모종의 순간 퍼포밍은 끝이 났다.



#4. 삶이 예술 같다면


<퍼포먼스 리서치2 - 포텐셜 에너지>에서 퍼포머들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사실 그런 걸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공연 중에도 느낄 수 있었고 그건 꽤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퍼포머들 스스로도 반응적으로 서로를 신중하게 살피는 마당에, 이미 약속되고 확립된 의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숱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당에, 내가 뭐라고 그걸 규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다만 공연은 세심한 긴장과 신뢰감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흔히 우리는 일을 하면서 "갈아 넣는다"는 말을 종종 한다. 세심함을 포기하고, 상황에 반응적이기를 미뤄두고, 욱여넣듯 처리해내는 것이다. 그런 시간을 오래 경험하고 나면 상황에, 환경에, 타자에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표현해야할 지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된다. 목표 지향적이지 않은 상황이 낯설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퍼포먼스 리서치2>는 나에게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이룰 것인지, 무엇이 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영혼에 반응해야 하는 대안학교 교사로서는 특히나 중요한 덕목이기도 한 그것을 말이다.


즉흥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퍼포먼스 리서치2>의 감상은 나에게 즉흥, 혹은 형대 예술의 난해함, 어려움에 대한 강박에서 반 발짝 정도는 물러설 수 있게 해줬다. 여전히 "그냥 느끼면 돼!"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열린 예술이 주는 묘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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