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볼렌: 잿빛 겨울 아래 따뜻한 위로

우울하지만 기다려지는 네덜란드의 겨울

by Zamun

출처: Bern fresen (Unsplash)


유독 덥고 혹독했던 여름의 끝에 자리한 가을은 그 존재감이 투명하다. 여름의 끝자락인 9월이 지나면, 기승을 부리던 햇볕은 9시가 넘어 간신히 떴다가도 오후 4시만 되어도 서둘러 자취를 감춘다. 서머타임이 종료되고 해가 짧아지면, 드럭스토어나 슈퍼마켓엔 비타민 D가 잘 보이는 진열대로 자리를 옮긴다.

네덜란드 겨울의 시작이다.

기본적으로 일조량이 많은 한국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 악명 높은 습한 바람과 잦은 비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욱 혹독하게 느껴진다. 기온상으로는 따뜻해 보일 수 있지만, 네덜란드의 악명 높은 태풍 뺨치는 바람과 비의 콤비네이션, 그리고 해 자체를 구경하기 어려운 절기상, 한국의 겨울보다 혹독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해가 짧아 서머타임이 종료된 이후에는 오후 4시만 되어도 햇볕을 구경하기 어려워지는 탓이다.


겨울을 알리는 신호, 올리볼렌 트럭


차갑고 눅눅해진 네덜란드 '반스(Vans, 집)'를 이 시기부터 따뜻한 불빛과 온기로 채워주는 것이 바로, 곧 눈이 올 것만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올리볼렌 트럭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시작할 때쯤인 10월부터, 인파가 많은 곳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트럭은 마치 '등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허연 슈거파우더 가루를 입 주변에 묻힌 사람(특히 어린아이)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럴 때 나는 바로 올리볼렌 트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동네마다 작게 마련된 올리볼렌 트럭들이 아기자기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라면, 네덜란드 도심 중심가에는 그 해 가장 잘하는 트럭들이 황금빛 깃발을 자랑하며 자리한다. 번쩍이는 올리볼렌 트럭의 직원들은 각자 분주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올리볼렌을 대접한다. 두꺼운 앞치마를 두른 트럭 주인아저씨는 끊임없이 반죽 덩어리를 떼어 뜨거운 기름 속으로 '풍덩풍덩' 던져 넣는다.


올리볼렌은 밀가루 반죽을 동글동글하게 뭉쳐서 튀겨낸 뒤, 슈거파우더를 듬뿍 올려 먹는 네덜란드의 전통 간식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 가득한 음식이며, 크기가 아이 주먹만 한 데다가 반죽도 꽤나 밀도가 있어 간단한 간식이라기보다는 한 끼 식사에 가까울 정도다.

올리볼렌 트럭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냄새는 추억의 간식이자 '겨울엔 올리볼렌'이라는 공식을 상기시킨다.

튀김옷에 튀겨낸 올리볼렌을 ‘찹쌀호떡’에 더 가깝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혹은 건포도나 사과 등 속 재료 없이 반죽 자체의 맛으로 승부하는 올리볼렌은 팥이 없는 찹쌀 도넛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올리볼렌의 가장 큰 매력은 찹쌀호떡이나 도넛과는 달리 튀긴 밀가루 반죽에 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면서도 툭툭 끊어지는 듯한 투박한 질감과 모양은 네덜란드 스타일 겨울간식을 형상화한 모습의 최종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슈거파우더를 걷어내면 그야말로 뭉쳐진 반죽을 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떼어내 대충 다시 한번 뭉쳐준 다음 그대로 끓는 기름에 넣은, 딱 그정도의 모양이니까. 투박하고 터프한 겨울의 맛을 담았달까.



네덜란드 겨울을 버티는 힘


올리볼렌은 단순히 겨울의 간식을 넘어, 네덜란드 사람들의 단합된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12월 31일 '신년 전야(Oudejaarsavond)'에는 가족, 친구들과 모여 샴페인이나 와인을 마시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이 올리볼렌을 먹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이 전통은 기름에 튀긴 동그란 모양의 올리볼렌이 악운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과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가 지극히 짧고, 춥고 어두운 계절을 보내야 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올리볼렌은 맛있는 음식을 넘어, 함께 모여 이 혹독한 계절을 견뎌내고 새로운 해를 축복하자는 따뜻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이상적인 올리볼렌의 맛과 풍경


이상적인 올리볼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잘 튀겨진 따뜻한 올리볼렌을 한 입 베어 물면, 겉의 바삭한 식감과 따뜻한 공기가 입안에 퍼지고, 그 뒤로 눅진한 반죽이 혀를 부드럽게 감싼다. 톡톡 터지는 건포도의 상큼함과 슈거파우더의 달콤함이 덧입혀져, '음~' 소리가 절로 나는 만족스러운 맛과 함께 어느새 주먹만 한 간식 하나가 손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파우더처럼 주변에 흩날리는 슈거파우더 가루만이 그 아름다운 순간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런 기준에서 내게 먹을 복이 있긴 했던 건지, 우리 동네 올리볼 아저씨의 올리볼은 내가 원하는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이상적인’ 올리볼을 자랑했다. 모던 타임스에 등장했던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는 콧수염에 걸걸하고 우렁찬 목소리, '네덜란드에서 내 올리볼을 먹고 있으니 너는 네덜란드인이다'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문하는 내 형편없는 네덜란드 실력에 한 마디라도 더 거들고 싶어하시던 다소 부담스러운(!) 친근감을 자랑하는 분이었음에도, 단골이나 아이들에게는 꼭 올리볼 한 개씩 더 얹어주던 다정함이 넘치는 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올리볼렌은 '로지네(Rozijnen, 건포도)'가 들어간 올리볼렌이다. 건포도의 식감을 좋아하진 않지만, 미묘하게 심심한 반죽에 콕콕 박혀있는 건포도는 마치 꿀처럼 부드럽다. 막 튀겨져 나온 올리볼에 주인아저씨가 "Suiker(설탕)?"라고 물어본다면, 나 같은 달달러버들은 잽싸게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해야 한다. 눈처럼 흩날리는 슈거파우더를 뿌려주며 'eets makkelijk(맛있게 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올리볼을 건네받아야, 진정한 올리볼을 영접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는 거니까.


때때로 어두운 찬바람에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 슈거파우더가 흰 눈처럼 소복이 쌓인 올리볼렌은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잿빛 하늘 아래 유독 우울해지기 쉬운 날, 따뜻한 올리볼렌 한 입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인다. 눅진한 반죽과 달콤한 설탕은 단순히 간식이 아니라,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위안과도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