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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민 Feb 20. 2017

[40+ 논어강좌]미래는 준비하고, 현재는 집중하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자왈인무원려, 필유근우)” 논어위령공     


살다보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고,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근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근심은 현재의  발걸음을 주저앉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미래’라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확실한 결과가 오는’ 게 아니라 ‘불확실한 결과가온’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닐 미(未)’에 ‘올 래(來)’, 이렇듯 ‘미래(未來)’는 문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다보니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두렵고 근심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1818년, 함브르크 미술관(인문학강의)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근심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근심이 가져다 주는 영향을 삶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중국의 작가 쑤쑤는 자신의 저서 《인생을 바르게 보는 법, 놓아주는 법, 내려놓는 법》에서 ‘사막쥐’의 사례를 통해 근심으로 입게 되는 폐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잿빛 모래쥐는 건기가 올 때쯤이면 풀뿌리를 모아 저장하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온 사막을 죄다 헤집고 다니며 열심히 풀뿌리를 모은다. 그런데 건기(乾期)를 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풀뿌리를 저장한 뒤에도 모래쥐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풀뿌리를 찾아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에 떨며 날카로운 소리로 울어댄다. 모래쥐 한 마리가 건기를 나기 위해 필요한 풀뿌리는 2킬로그램 정도이지만 실제로 모아들이는 양은 10킬로그램이 넘는다. 그중 대부분은 썩어버리는데도 모래쥐들은 여전히 풀뿌리를 필요 이상으로 모아들인다.”     

‘사막의 잿빛 모래쥐’가 건조기를 잘 지내기 위해 풀뿌리를 모으는 건 당연한 행위입니다. 과학자들은 ‘모래쥐’의 이러한 습성은 유전인자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태생적으로 습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조기에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피곤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필요한 양의 몇 배, 심지어 몇십 배나 많은 풀뿌리를 모은다는 데 있습니다. 걱정이 미래에 대한 지나친 준비를 하게 되고 그로인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매사에 근심에 빠져 살 수는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진짜 두려워하고 근심해야 할 일과 쓸데없는 염려를 구분"하는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원치 않는 두 단어가 항상 따라 다닙니다. 바로 후회와 근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삶에서 이 두 단어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 달력에서 두 개의 날을 삭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날은 바로 '어제와 '내일'이라는 날입니다. '어제'는 '후회'로, '내일'은 '근심'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지적한 말입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 어니 J. 젤린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퍼센트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퍼센트는 사소한 사건들,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퍼센트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어나지 않을 90%의 걱정으로 인생을 낭비하느니 과거와 미래의 불확실한 짐은 벗어버리고 오늘 지금에 집중하라는 충고입니다. 근심에 빠져 살면서 오늘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이렇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선비가 정월 초하룻날 앉아서 일 년의 양식을 계산해보면, 참으로 아득하여 하루라도 굶주림을 면할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믐날 저녁에 이르러 보면, 의연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 한사람도 줄어든 이가 없다. 고개를 돌려 거슬러 생각해보아도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다. 너는 이러한 이치를 잘 깨달았느냐? 누에가 알에서 나올 만하면 뽕나무잎이 나오고,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울음소리를 한번 내면 어머니의 젖이 이미 줄줄 아래로 흘러내리니, 양식 또한 어찌 근심할 것이랴? 너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나 그것을 걱정하지는 말라.”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은 현재의 시간을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희생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누에가 알에서 나오기 전에 뽕나무잎이 나와 있고,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이 이미 예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고, 또한 시간과 환경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불확실성이 걱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근심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면서, ‘허상’을 붙들고 인생을 낭비하게 합니다. 토마스 칼라일도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멀리 희미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분명하게 놓여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일단 근심이 시작되면 ‘내가 걱정해 해결할 수 있는 것과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구분해야 합니다. 일 예로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는 근심의 영역이 아니라, 우산을 준비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지,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신의 영역입니다.     

본문에서 공자는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이 말은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현재는 근심으로 마음을 빼앗긴다”라는 의미입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는 “걱정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라는 말로 풀이를 했는데, 장래의 일은 걱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순자》 <대략>편에는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우환이 터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앞날은 예측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행적’을 잘 살피면 ‘앞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춘추시대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로도 잘 알려진 오나라와 월나라가 전쟁을 치룹니다. 당시 월나라 왕은 구천이었는데, 숙적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목숨을 구걸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월나라 왕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쓸개를 천장에 매달아 핥으면서 원한을 갚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나라를 재건한 월왕 구천은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일은 오나라 왕 구천을 도와 공을 세웠던 문종과 범려, 두 명의 충신이 있었습니다. 오나라를 무너뜨린 뒤, 범려는 구천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자는 구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나라로 떠납니다. 그러면서 범려는 문종에게 "하늘에 나는 새들이 모두 사라지면 좋은 활을 거두어들이고, 날쌘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법입니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이 새처럼 검고 뛰어나와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나쁜 인상입니다."라고 하며 함께 떠날 것을 권하지만, 문종은 범려의 조언을 무시하고 남아 있다가 결국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문종은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항복할 때 오나라 부차와 담판을 벌여 월나라 구천의 목숨을 구한 충신이었기에 그는 월왕 구천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문종은 월왕 구천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문종은 공자의 말씀처럼 월왕 구천의 ‘과거의 행적’을 잘 살피고, “사람이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죽음으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고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적용된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시간 구분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구분은 우리 마음의 세 가지 능력, 즉 ‘기억’, ‘지각’, ‘기대’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기억하는 능력’과 ‘지각하는 능력’과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 뿐이며,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기억’은 과거의 현재이며, ‘기대’는 미래의 현재일 뿐입니다.      

과거는 후회로, 미래는 근심으로 인해 현재를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여섯 시간을 주면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기겠다. 그 중 첫 네 시간은 도끼날을 갈겠다." 이 메시지는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라는 조언입니다. 미래는 ‘반드시’ 옵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다가올 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미래를 ‘반드시’ 준비해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의 계획과 실천으로 준비하는 것이지, 근심과 걱정으로 앞길을 예비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를 낭비하면 미래는 없습니다.     


권영민 소장(권영민인문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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