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면서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
“子曰, “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자왈 학이불사칙망, 사이불학칙태)” 《논어∙위정》
《논어》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가 말하는 ‘배움’은 그 당시에도 중요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 중요성은 그 가차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공자는 ‘배움’과 ‘생각’을 결합해야 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배움으로 배움이 완성이 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더해져야 비로소 배움이 완성된다는 게 공자의 생각입니다.
배움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의 공부입니다. 학생 때 공부시간은 세계 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비교해보면 한국 학생들은 약 20시간으로 핀란드의 세 배(약 7시간), 일본과 비교해 봐도 약 2.5배(약 8.5시간)에 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방과 후에 평균적으로 6시간을 공부하고, 일본 학생들은 4시간, 핀란드 학생들은 2시간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교육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는 핀란드의 세 배에 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공부의 시작과 끝, 목표가 오로지 시험과 그 결과인 성적으로 좌지우지되는 공부만 해 왔기 때문에 정작 삶에서 어려움을 맞닥뜨리면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100세 시대를 대비한 배움입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중년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정작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적합한 답을 알지 못하고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의 배움은 기존의 배움과는 달라야 합니다. 성인 교육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스펙을 쌓고 많은 지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인의 배움은 일반화된 지식의 확장보다는 정보 수집을 넘어 습득한 지식을 분석하고 새롭게 조직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통합능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움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지식을 걸러내고 분석하고 재조합할 수 있는 사고력이 중요합니다.
배움만큼 생각도 중요합니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파브르는 어느 날 ‘행렬형 쐐기벌레’에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이 벌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독특한 행동을 하는데, 이 벌레는 둥지에 나오면 마치 서커스단이 코끼리처럼 일렬로 줄지어 앞을 따라가는 습성을 가진 벌레입니다.
파브르는 선두를 따라가려는 행렬형 쐐기벌레에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만약 쐐기벌레들을 둥글게 늘어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파브르는 이 벌레를 항아리 주위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쐐기벌레들은 항아리 주위를 지름 12인치 행렬을 지어 6일이 지나도록 계속 돌고 돌았습니다. 급기야 기진하고 굶주린 수많은 쐐기벌레들이 쓰러진 뒤에야 원형 연결이 무너지고 두세 마리가 겨우 살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 파브르는 그 실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쐐기 벌레들은 피곤하고 굶주리고 이슬을 피할 수 없어 밤마다 추위에 떨면서도 앞에 남겨진 자취를 따라 수백 번씩 고집스럽게 돌고 돌았다. 이것은 쐐기 벌레들에게 그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초보적인 판단력조차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지훈, 《단, 버리고, 세우고, 지키기》에서 재인용.
현대인의 삶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생각’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걸어갑니다. 생각이 없으면 앞사람을 따라가야 할 지, 돌아갈 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갈 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쐐기벌레’처럼 “밤마다 추위에 떨면서도 앞에 남겨진 자취를 따라 수백 번씩 고집스럽게 돌고 도는”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배움은 이렇듯 생각으로 이어지고 가치판단의 중요한 결정 요소로 작용해야 합니다. 지식은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판단력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삶의 가치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명나라 말엽 장호라는 사람이 옛 경전에서 좋은 글귀를 모아 엮은 책 <학산당인보 學山堂印譜>에서 이런 말을 소개합니다. “속됨을 고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다.” 책의 가치는 삶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배우고, 배움은 생각으로 완성되고, 생각으로 삶의 ‘속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은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데, 이 책에서 율곡 선생은 올바른 배움에 대한 지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만약 입으로만 읽을 뿐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몸으로 행하지 못한다면, 책은 절대로 나는 나대로일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율곡 선생은 ‘배우고, 생각하고, 행하고’ 이 세 가지가 뒤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배우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면서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 공자는 ‘배움’과 ‘생각’은 나누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수레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양쪽 두 바퀴가 필요하듯 “배움에 생각을 더하고, 생각에 배움을 빠트리는 않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배울 때 생각하지 않으면 머리에는 지식의 흔적은 남겠지만, 정작 지혜가 필요할 때 아무 쓸모없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과거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에서는 지식이 우대받던 시대였습니다, 저학력자보다는 고학력자가, 부족한 스펙을 가진 자보다는 다양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사회활동에 유리했던 게 사실입니다. 과거의 시대는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주어진 답을 빨리 찾는 자’가 유리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업사회가 아닙니다. 기존 정해진 지식으로 ‘주어진 답을 찾는 시대’가 아니라 ‘자신이 답을 만들어가는 시대’입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빨리 찾아 따라가는 방식이 아닌, 자신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시대에 맞는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데, 산업사회 때 교육은 받은 기성세대는 여전히 구시대 교육처럼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화두를 던진 것도 ‘자신을 앎’은 지식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서 만들어가고 있는 지 돌아보라는 의미입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교육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가르치는 자로 교육자로 보지 않고, 오직 다른 이들을 ‘생각’ 하게 돕는 자라고 말합니다. “생각, 인생이라는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설계도. 나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생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지식’과 ‘생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지식은 다른 이의 발자취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라면, ‘생각’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설계도와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만든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자신이 그린 설계도대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자신만의 아름다운 집을 지울 수 있도록 우리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배움의 목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조지아 주립대학교 데이비드 슈워츠 교수는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은 다른 것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큰 생각’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큰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생각이야말로 우주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하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며,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는 것이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키나 체중이나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각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적인 삶은 배움의 높이에 생각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권영민 소장(권영민인문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