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택시_학동역
나는 그대의
빈틈이 있었다면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했을 것이다
어둠은 내려 앉는데
그대 들려줄
한줄 시도 못쓰고
기억속으로
차가운 안개비
안개비만 내린다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며
가슴 저미는
그리움 쌓이고
세상이 온통
시들었어도
깊고 고요한
그대 품에서
잠들었으면
잠시라도
잠들었으면
박정수, <그대 품에서 잠들었으면>, 1991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온 옛날 노래를 듣다보면 가사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차라리 시라고 해도 좋을 노랫말들이 멜로디의 흐름과 어우러져, 그 자체로 완결적인 하나의 작품이 된다. 쾌적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택시의 뒷자리에서, 잦은 브레이크로 끽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거의 멀미를 할 지경이다가도, 한순간에 깨끗하게 정화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이 노래의 가사 중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며' 라는 표현이 귀에 꽂혔을 때였다.
노래의 전체 가사를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기억 속으로 차가운 안개비만 내린다' 에서도 한차례 놀라웠는데, 그대의 '빈틈'을 사랑의 필요조건으로 선언하고 있기까지..
내가 사랑에 빠진 순간은 항상 상대방의 빈틈과 맞닿아 있다. 얼음길에서 미끄덩 하며 중심을 못잡고 넘어질 뻔 하는 모습도, '진검승부'를 '진담승부'로 거듭, 게다가 확신에 찬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멋대로 구겨진 셔츠의 소매도 나를 반하게 한 빈틈들이었다. 나 아니면 모를 것 같은 이 빈틈이, 적막한 우주를 유영하는 존재의 외로움을 달래줄 것만 같았다.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