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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Aug 03. 2020

한남동, 흔한 꽃다발과 사랑한다는 말

이것 또한 사랑이야




한 손에 꽃다발을 든 D가 저벅저벅 다가와 내게 꽃다발을 툭 내밀었다.



무심하게 꽃을 쥐어주곤 별다른 말이 없어 웬 꽃이냐 물었더니 내가 좋아할 거 같아서 사 왔단다. 누군가에겐 흔한 꽃다발일 테지만 그간 길고 짧은 연애들을 하며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꽃 선물이었다. 그래서일까 왼 손엔 D의 손을 쥐고 오른팔엔 꽃다발을 아이처럼 고이 안고 한남동 길거리를 걷는데 자존감이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남자와 꽃을 둘 다 가진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은 기분에 취했다.



이태원의 좋아하는 피자집에 앉아 여전히 싱글벙글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D는 꽃을 선물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했다. 꽃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운 선물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꽃은 "꽃"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주고받는 사람이 서로에게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에만 부담 없이 줄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관계가 이제 정말 편안한가 봐요!" 라 묻고 싶었으나, 내 눈을 마주치던 그의 눈과 꽃이 건네는 말보다 진한 마음을 느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전 연애들은 어떠했나.

시작의 이유는 대개 유사했지만 헤어짐의 이유는 각기 달랐다. 사랑의 모습은 비슷했으나 사랑의 방법은 달랐다. 과거의 연인들에게 나는 자주 안달 났고 때론 미련했고 종종 재촉했다. 주로 참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고 상처 받는 것도 이해의 과정이라 여겼다. D와의 연애는 시작의 이유는 다시 유사했지만 사랑의 모습이 다르다. 나는 그에게 안달나지도 않았고 심장 또한 요동치거나 쪼그라드는 일이 없었다. 낯선 모습을 한 "사랑"에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일까 하는 오랜 고민 끝에 나는 D에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열렬한 사랑의 감정은 아니지만 D 옆에서 안정됨을 느껴요.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것도 사랑인 것 같아요.' 라며 내 마음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꽃다발을 받은 그 날, D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했다. 뒤에서 나를 꼭 안으며 "J, 사랑해요." 라 작게 속삭이곤 다시 한번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그의 사랑한다는 말에 내가 느껴왔던 이 안정된 감정 또한 사랑임을 확인받은 듯해 조심스레 나도 그를 사랑한다 답했다.




누군가에겐 흔한 꽃다발과 나에게조차도 흔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받은 날이었다.

작은 꽃다발과 낮게 힘주어 말한 사랑한다는 말에서 D의 소중한 마음과 우리가 함께 누적해온 지난 시간들을 확인하곤 마음이 가득 차오르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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