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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Aug 12. 2020

화정동 은빛로, 야곱과 첫경험

강렬했던 그의 냄새

 "D. 내가 첫경험 얘기해줬나요?"



재택근무를 마치고 D와 이마트에 저녁거리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뭐 먹지라는 질문에 "자극적인 거! 맵고 짜고 기름진 거! 이를테면 곱창볶음 같은 그런 거!"라고 말하던 나는 문득 나의 첫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도 친구들과 나의 첫경험의 풍경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첫경험에 대한 소감을 여러 번 말한 기억은 있으나 나의 첫경험의 순간을 구성했던 다른 어떠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첫경험에 대한 로망은 딱히 없었으나, 나의 첫경험은 첫 키스의 순간처럼 가슴 설레지도 산뜻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딱히 로맨틱 영화 속의 한 장면과 같은 걸 바란 것도 아닌데.


20살의 내가 만나던 남자친구가 연출한 나의 첫경험 무대는(그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던) 홍콩 누아르 영화 같았다. 여름도 아니었는데도 습습했고 조명을 다 꺼버려 어두운 방 안에는 닫아놓은 커튼 사이로 영등포 모텔촌 거리의 간판들의 새빨간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강렬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자극적이었던지 도무지 그 행위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냄새의 근원은 모텔방 한 귀퉁이의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먹다 남은 야채곱창. 나의 구남친이 저녁도 안 먹었으니 곱창이나 포장해가자하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첫경험날에 야채곱창을? 허름한 곱창집에 들어서던 순간에도 허연 돼지곱창에 양배추, 깻잎, 당면 그리고 붉은 양념을 넣어 달달 볶아내는 주인아줌마를 멍하니 바라볼 때에도 내 머릿속은 반복되는 하나의 질문으로 가득 찼다. 첫경험날에 야채곱창을??



뜨끈한 야채곱창을 받아 우리는 근처 모텔에 들어갔다. 낡은 소파에 앉아 나의 구남친이 펼쳐놓은 야채곱창을 몇 점 주워 먹으며 불어 터진 당면을 참 맛있게도 먹던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허기가 야채곱창으로 가셨을 때, 그는 내게 키스를 했던 것 같다. 양치를 했었나. 마늘도 넣어 쌈까지 싸 먹었던 거 같은데. 그 푹 꺼진 소파에서 락스 냄새 짙은 침대로 가는 그 순간에도 내 첫경험이 이렇게 야채곱창에게 지배되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맞아. 저 첫경험날 야채곱창 먹었어요. 누가 첫경험날 야채곱창을 먹어요. 그죠?" 라며 그 날의 기억을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내게 D는 나의 첫경험의 경험을 안타까워하며 "뭐야 그 자식. 앞으로 야곱이라 불러요 야곱."이라 했다. 나는 깔깔 크게 웃으며 "야곱! 야곱 좋네!"라 했다.





여전히 야채곱창은 좋아하지만 내게 그런 첫경험의 순간을 만들어준 구남친이 때때로 미웠다. 설렘과 불안, 두려움의 감정마저 눌러버렸던 야채곱창의 냄새로 가득 찼던 그 시간을 굳이 꺼내어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8년 전의 나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예쁜 애를 야곱한테 빼앗겼다며 분해하는 그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 미움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도 나도 어렸고 서툴렀으며, 그럼에도 어린 우리들이 할 수 있던 나름의 노력을 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가 그날의 너를 야곱이라고 웃고 놀릴 수 있으니 미움은 이쯤이면 됐다 싶다.




그리고 야곱과 첫경험이라니.

꽤  재밌는 이야기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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