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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Jan 13. 2016

경찰 633과 아비가 서 있던 그 곳

중경삼림의 여운만큼이나 길었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쯤,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때 PMP라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못하는 게 없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때만해도 스마트폰은 세상에 없었다. (적어도 내 주위엔 없었다. 사과(?) 본사엔 있었을지도.)




그 시절 전국 고등학생들의 인터넷 강의 시청을 책임지던 것이 PMP였다.

지금도 물론 PMP는 있지만 그때보단 사용자가 훨씬 많이 줄었고 최근엔 출시도 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인터넷 강의(를 빙자한 영화감상) 시청을 목적으로 부모님을 졸라 PMP를 살 수 있었고

대입 스트레스를 영화감상으로 나름 건전하게(?) 풀었다.

(인터넷 강의도 물론 열심히 들었다)




고2와 고3. 그 2년동안 300개가 넘는 영화를 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중경삼림(重慶森林 : Chunking Express, 1994)'이었다.




나름 어렸던 그 땐, 영화를 보면서 사실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뭔가 정신없이 느껴지는 연출과, 주인공들의 대사가 임펙트 있게 긴 것도 아니었고, 기억에 남을만한 에피소드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왕비가 불렀던 OST만이 조금 기억에 남은 정도였다.



중경삼림보다 첨밀밀을 더 좋아한 그 때였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중경삼림을 다시 보게 됐다.

그 이후 중경삼림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10대에 봤던 영화가 아니었다.





정신없게만 보이던 낡은 홍콩의 모습에 낭만이 보였고

알 수 없는 나쁜짓을 한다고만 생각했었던 임청하의 담배 문 모습이 멋있게 보였고

경찰의 집에 몰래 들어가 집을 바꿔놓던 아비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이해가 안됐었는데,

그게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이었음을

알았다.




경찰633(양조위)의 집을 몰래 훔쳐보던 아비(왕비)가 서 있던 곳이자,

아비가 일했던 패스트푸드점 '미드레벨 익스프레스' 바로 옆을 지나다니는 에스컬레이터.






그 에스컬레이터가 기네스북에 오를만큼 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라는 것을 안 건, 조금 지나서였다.







아무런 계획없이 떠났던 홍콩이었지만,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만큼은 꼭 가보자 했었다.




여행 둘째날

나는 완차이에서 늦은 아침을 먹은 뒤,

미드레벨이 있는 센트럴로 가기 위해 트램에 올랐다.









MTR 센트럴역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자주 볼 수 있다.

덕분에 나 또한 어렵지 않게 미드레벨을 찾을 수 있었다.




길고 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시작 되는 곳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에스컬레터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으니

그 어느 홍콩 영화에서 봤던 풍경들이 눈 앞에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행복했다.

여행자이기에 가능한 이 여유로움과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말이다.




미드레벨이 아무리 길고 멋지다한들,

출퇴근하는 집 바로 앞에 있었다면

에스컬레이터의 낭만은 일상이 되어 익숙함으로 바뀌고, 느림의 미학보단 빠름의 치열함을 더 갈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의 나는 여행자였기에

움직이는 철계단 위에서 봤던 홍콩의 모습에서 낭만을 느꼈고,

아비가 훔쳐보던 경찰633의 집을 찾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의 기억은 여행 중 가장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그 긴 에스컬레이터가 한번에 다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구간 구간 끊어져 있으며 필요한 곳에 내릴 수 있게 되어있다.




나 또한 목적지 없이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고

다시 타고 싶으면 올라 타고, 그랬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나는 점점 더 이곳이 좋아지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번화가 보단 조용한 골목길이 더 좋다.


여행을 하면서도 이름 모를 골목들을 많이 갔다 오곤 했는데,

미드레벨은 골목의 천국이다.


다음번에 다시 미드레벨을 오게 된다면 미드레벨 위의 모든 골목을 다 가보고 싶은데,

또 올 수 있겠지?








정확한 위치도 이름도 모르는 골목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현지인 같았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래.

이 사람들에겐 이곳은 단순히 집 앞일 뿐인데,

카메라를 들고 자기네들 집 앞을 담고 있는 내가 좀 어색하게 보일만도 했겠다.









골목에서 바라본 미드레벨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유명한 홍콩의 소호(SOHO)거리가 미드레벨 위에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중간 쯤 왔을까,



소호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소호거리를 걸었다.










그 많은 가게들을 그냥 지나쳐 온 것이 지금까지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더라면


작은 펍들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했던 소호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오는 거였는데 ..










에스컬레이터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오전 출근시간을 제외하곤, 상행뿐이라서

내려올 땐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라가면서도 나중에 내려올 생각에 잠시 걱정이 스쳐지나갔지만,


힘든건 미래의 나지 현재의 나가 아니니까

일단 올라가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다양한 홍콩의 모습을 봤는데,

이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홍콩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富)와 빈(貧)이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던 홍콩.


하늘에 닿을듯한 빽빽한 고층빌딩과 허름한 오래된 주택의 공존은

나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세계 빈부격차 1위 홍콩.


살인적인 주거비와 높은 물가, 난민의 유입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인 홍콩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산 활동은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사회적 인프라와 지원이 따라갈 수가 없어 사실상 쳇바퀴 같은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만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부패한 정부의 말로를 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보이는 시장에 당장 내려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산 건 자두와 비슷하게 생긴 과일 하나뿐이지만,


구경만으로도 재밌는 건 어느 나라 시장이나 다 똑같은가 보다.













에스컬레이터보다 좀 더 여유롭게 올라가고 싶다면,

계단으로 걷는 것도 좋다.



여행에서 걷는 것만큼 일상에서도 걷는 걸 좋아했다면,

지금 내 몸매는 걸그룹 뺨을 칠 수 있었을까 ,,

(그건 아니겠다)















계속 올라가니 관광객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보통은 중간 위치인 소호쯤에서 내려간다고들 하더라.




하지만 남는 건 시간뿐인 여행자였던 나는

이 에스컬레이터의 끝을 봐야지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홍콩은 고지대에 있는 집들이 비싸다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갈수록 초고층 빌딩들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유층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골목들을 담으며

점점 에스컬레이터의 끝을 향해 올라갔다.








몇개의 에스컬레이터를 지났을까,





미드레벨의 마지막 에스컬레이터





첫번째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지 한시간 반 정도 만에,

에스컬레이터의 끝에 도착했다.










예상했던대로, 미드레벨의 끝이 다다른 동네는 조용한 부촌이었다.

역시나 관광객은 나뿐인듯 보였다.




동네를 조금 걸었지만, 있는 건 빌딩들 뿐이었다.

색다른 재미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심심한 모습에 서둘러 다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다시 천천히 내려갔다.









좋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까지도,

미드레벨 위에서의 그 느낌과 기분이 생생할만큼.







무미한 에스컬레이터일 뿐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경찰633을 좋아하던 아비의 얼굴이 생각나서였을까,

조금은 특별했고 설레였다.











그 곳에 경찰633과 아비는 더 이상 없지만,

그때 그 시절의 중경삼림을 추억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여전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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