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가이드로 산다는 것

34년 차 영어 가이드의 생존 전략

by 스윗비타


"영어 가이드로 34년? 베테랑이시네요."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받는다. 특히 요즘 들어 새로 가이드 자격증, 정확히 말해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막연히 그 꿈을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말이다. 맞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그만큼 시선에 무게가 실려 있기도 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빠르게 지나간다. 학교 졸업하고 친구에게서 가이드라는 직업이 있고, 자격증반이 있다더라 해서 들어선 이 직업을 지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고 피식 웃으며 이야기한다.



예측 불가능한 위기 속, 프리랜서 가이드의 삶


그동안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방문객을 상대하는 업계에선 사실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남북한 관계, 국제정세의 변화는 마치 일기예보처럼 맨살에 와닿았다. 덕분에 일과 관련해 현대사를 자연스레 언급하기도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이 '그땐 그랬지' 하면서 끝도 없이 하는 말들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동안의 변화는 최근 몇 년 동안의 변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에서 일하는 English Speaking Guide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뿌리 없는 수련의 시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고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고 살길을 모색했을 때, 아무도 영어가이드(편하게 외국어 가이드를 대표해서 말한다)가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 그럴 정신이 없었다. 호텔들이 문을 닫고, 항공사, 버스회사가 다 죽을 맛이었다. 국가에서 보조해 주고 걱정해 준다고 해도 결론은 각자 살아남아야 했다. 가이드들도 50만 원 정도 하는 위로금을 받았던 것 같다. 프리랜서는 마치 넓은 호수에 예쁘게 잠깐 피어있는 수련 같았다. 외국인들에게 단청이 아름다운 사찰을 소개할 때는 한창 피어난 꽃으로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일 년생 화초 같다는 생각으로 산다. 숲을 지키는 뿌리 깊은 나무는 될 수 없었다. 숲은 큰 의미에서 한국이고, 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관광정책자들이고 층층이 내려오다가 최전선에서 직접 손님을 상대하는 '분'이 가이드와 기사다.


어느 직종이나 프리랜서는 그런 리스크를 안고 있다. 그중에서 지명도가 높아지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먼저 전화가 오고, 여행사나 기관에서 일정 관련해서 조언도 구하고 동선 변화도 의논하는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로운 바람은 언제나 분다. 어느새 뉴 페이스가 나타나 자신감 넘치게 자기 포장을 하고 달려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겠나. 세상은 다 그렇게 변화 속에서 이어졌다.






변화의 시대, 가이드에게 던지는 질문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가장 강한 종도, 가장 지적인 종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라고 말했다. 거창한 의미를 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2025년은 알고 싶지 않아도 변화가 온몸을 흔들어대는 시기다.

코로나 팬데믹에 적응한 인간들은 숨 막히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물론 그전에도 여행은 행복한 인간의 활동이었지만, 전 세계가 몇 년 동안 꼼짝 못 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나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싸돌아 다니기로 결정한 듯하다.

여기에 그 멈춤의 시간 동안 대박이 난 '넷플릭스'를 대표주자로 한 OTT 서비스와, SNS 속에서 '한류'가 어마무시한 힘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오징어게임> 시즌 1의 폭발력으로 유럽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딱지치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입이 딱 벌어졌었다. 흔하게 지나쳤던 설탕가루 녹인 '뽑기' 사탕을 사려고 대학로에 줄을 서다니. 종의 변화를 논하기 전에 '세상이 이렇게 변해? 뭐지?' 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별나긴 한가보다 하면서 다시 문화의 힘을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문화 콘텐츠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가 됐다. 2024년 문화 콘텐츠 수출이 136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2%나 된다. 전체에서 볼 때는 작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국이 관광객에게 인지도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드라마, 아이돌의 인기는 올라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서구권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남북한 구도를 벗어나진 못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 있었다. 현장에서 손님들을 만나면서 받는 질문과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느꼈던 점들이다. 그러나 근 몇 년 사이 지진이 일어나듯 그들의 시선이 바뀐 것을 느낀다. 말이 필요 없다. 당장 서울 시내에 나가보라. 광장시장, 명동 칼국수, 홍대 거리, 명동...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간한 『세계 속의 대한민국(2022)』 통계집에 따르면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분석한 우리나라의 국가 이미지 순위는 2020년 13위에서 2022년 5위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젠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1위가 6년 연속 K-pop이며, 넷플릭스에서 소비되는 K-콘텐츠 시청 시간이 코로나 전과 비교해 6배나 늘었다. 아직도 순위 매기는 것 좋아하는 세대인 나는 한류로 시작된 문화 콘텐츠, 국가 브랜드 순위가 높아진 것에 진심으로 기분이 좋다.






변화된 관광 생태계, 그리고 가이드의 역할


이즈음에 현장에서 일하는 가이드들은 한창 희망에 부푼다. '물이 들어올 때, 노 저어라'가 나에게 적용될 것이라 믿으며, 거리를 바라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전화통에 불이 나진 않는다. 왜일까?

업계에 일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된 업계의 생태계를 알아야 살 수 있다. 무엇이 변했을까?

과거에는 단체 패키지 중심의 여행이 주류였다. 일정, 식당, 관광지가 모두 정해진 상태에서 가이드가 배정되고, 인원수로 가격 경쟁을 했다. 성수기엔 가이드가 모자랐다. 그러나 지금은…



소규모 자유여행이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 인천공항에서 전철로 서울 시내까지 쉽게 이동 가능하고, 호텔은 직접 앱에서 예약하고 들어와, 편하게 대중교통으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무료 가이드를 받는다.

플랫폼 기반 가이드 섭외가 일상화된다: 여행 일정 중에 가이드가 필요한 장소만 앱에서 선택하여 현지에서 합류하여 몇 시간만 투어 한다. 관광지, 체험, 주제까지 다양하게 시간별로 세분화되어 손님이 쉽게 선택한다.

관광지 정보는 유튜브/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하고 별점으로 평가, 검증한다.

오디오 가이드, QR 가이드, 로봇 가이드, AI 가이드들이 각 나라별 언어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

가이드가 필요 없다.



이렇게 나열하지 않아도 이미 변화한 업계 상황은 알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가이드들은 예전보다 뛰어난 언어 실력도 있고, 세대를 떠나 의욕면에선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기존의 가이드들에게 기대보다 일자리가 넘치지 않았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있는 곳에 장이 선다'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을 사랑하는 방문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가이드들은 기회가 많아진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럴듯하다고 영원히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향후 관광업계와 가이드의 생태계는 더 변화할 것이고, 개인도 변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위기 속에서 찾은 네 가지 해답


암울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는 결국 인간이어서다. 이 글을 생각하면서 이미 문제의 해답은 있다고 생각했다.


1.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공감'이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우리는 아직도 호모 사피엔스다. AI가 이미 가이드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AI다. 투어 할 때 난 손님들에게 '사람'이 가이드해주는 것을 감사하자고 농담처럼 말한다. 손님들도 다 고개를 끄덕인다. 돈을 지불하고 여행 와서 AI와 식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극소수다. 첨단 기술을 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하자. 한국 음식을 먹을 때, 가이드가 이 음식은 어떤 스토리가 있고, 어떻게 손맛을 내고, 나의 어릴 적 엄마의 음식은 어땠는지 말해주는 것이 그들의 기억에 남는다.



2. 여행자들은 나만의 작고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여행사 투어와 괴리가 생긴다. 단체 관광에서 나만하고 싶은 경험은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혼자 여행하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리뷰 창에 올라갈 것이다. 인원수가 적은 여행일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이드가 개개인의 욕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예스, 노'라고 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가이드의 관심이나 적지만 개인적인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커피와 카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가이드가 살짝 다가와 호텔 근처에 혼자만 가볼 수 있는 예쁜 카페와 거기서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알려주고 간다면 어떨까? 단체 여행 중이지만 그는 맞춤 서비스를 받은 것이다. 현생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질병의 원인은 '외로움'이 아니던가. 잘 생각해 보면 답이 보인다.



3. '착한 여행'이 대세다.

이제는 '가치 있는 소비'로 관광도 인식되고 있다. 인간들은 의미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본인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가치의 의미다. 전 세계적으로 '오버 투어리즘'이 문제가 된다. 여름 성수기나 황금연휴에 제주도, 북촌 한옥마을 주민들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선 'Tourist Go Home' 시위가 한창이다. 북촌 한옥마을도 이제 더 이상 관광버스 진입이 금지고 설령 간다고 하더라도 외국인들의 인상이 좋지 않다. 그래서 가이드들 입장에선 지방 중소도시로 일정이 잡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시간과 장소에 쫓겨 다니는 것보다, 산길을 걸어 다다른 산사에서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와 절 앞 산채비빔밥 식당을 더 기억할 것이다. 현지에서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준비한 식탁, 함께 만들어 본 부침개와 막걸리. 환경도 생각하고 지역문화도 경험하고 나면, 가이드가 동행한 한국 여행의 의미가 한층 진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이제는 '디톡스 여행'이 답이다.

최근 들어 '템플스테이' 즉, 불교 사찰 체험이 인기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세대가 '디지털 디톡스' 여행을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강원도 산중 사찰, 제주 비양도, 마라도 등 아예 통신 신호가 약한 곳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SNS 업로드 대신 아날로그 방식의 일기 쓰기, 모닥불 앞에서 그냥 있기, 전자기기 없이 새벽 종소리에 기상하기.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느긋해진다.

이제는 투어 일정에 하루 정도는 이런 디톡스 일정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가이드 입장에선 식사나 주차 문제를 먼저 신경 써야 해서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현재 변화하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은 당연히 투어에도 반영된다. 더불어 지속적인 방문객의 유치를 위해선, 가이드를 넘어 기관에서도 생각해야 할 답이다.





경험의 가치, 그리고 인간 중심의 미래



나는 이 글에서 처음에는 한류와 한국의 브랜드의 위상의 긍정적 변화에 대해, 영어 가이드로서 자축했다. 동시에 나이와 경험이 변화하는 시장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고민해 봤다. 예전에는 외국어 구사 능력이 높게 인정받고, 현장에서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는 지식이 가이드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됐다. 전문 직종으로 살아남기에 꼭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젠 AI가 합류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환경에 적응된 사람들의 여행이 시작된다.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이 쓸모없어지기도 하고, 더 빛이 나기도 하는 변곡점을 맞았다. 경험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여행의 의미는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유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잠시나마 함께했던 가이드의 존재감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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