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은 섬에 있을 때 만들어야 한다

어느 베테랑 가이드의 재정비

by 스윗비타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을 집어 들었다가 이내 덮어버린 적이 있다. 빽빽한 활자 속에 나열된 그의 남다름과 성공 서사가 그날의 내게는 왠지 모를 거리감과 피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6년의 오늘, 나는 다시 그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수년간 다짐만 하며 먼지를 쌓아두었던 문장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그냥, 일단 시작하라(Just Do It)."



문명이 바뀌는 소리, 정점에서 느끼는 균열


관광 현장에서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수만 명의 외국인과 한국의 길 위를 걸었다. 치열하게 사람을 연구하고, 역사적 장소를 파헤치고, 현장의 변수들을 몸으로 막아내며 살았다. 그 결과 업계에서 인정하는 베테랑이 되었고, 고객 만족도 98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이제 여한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나를 증명해 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변화는 결이 다르다. 미래예측 전문가들이 날카롭고도 무거운 표정으로 무대 위에서 말하는 '새로운 문명의 시작점'은 이미 우리 거실까지 들어와 있다. 인공지능(AI)은 이제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속절없이 당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올라타야 하는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힘든 속도로 우리 삶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사회로 나갈 청춘들 조차 할 일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현실이 코앞에 닥쳤음을 느낄 때, 34년 차 베테랑 가이드인 나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증명했다는 오만과 대체될 수 있다는 공포


그동안의 내 고민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더 실력을 쌓으면 성취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이 바뀌는 시간은 노력의 양보다 **'방향의 전환'**을 요구한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위치에 서 있다. 고객의 좋은 평가는 기분 좋지만, 고용주의 선택이 끝나는 순간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불안감을 나누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동료들의 목소리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서로 위안을 나누지만, 그 위안이 가라앉는 배를 구해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췄던 시기, 디지털 세계라는 낯선 문턱에서 머리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겪으며 입문을 선언한 지도 5년이 흘렀다. 돌아보니 그 서툴렀던 시작이 내 업(業)을 이어가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다. 디지털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강의라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도 했고, 일을 지속하는 과정에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가이드 현장으로 돌아가 성수기에는 손님들과 부대끼며 일을 하고, 겨울이면 도서관과 커피숍에서 새삼 대학 입시를 준비하듯 그동안 놓친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베테랑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부족한 실력을 채워 넣었던 그 시간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지만, 구조적인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기록, 연결되는 경험의 가치

최근 평생의 업을 정리해 두꺼운 책을 내신 선배님을 뵈었다. 그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역작이었다. 지식의 깊이에 감탄하며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지만, 한편으로는 귀한 지혜가 더 널리 쓰이길 바라는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방대한 자료와 선배님만의 통찰이 단 한 권의 종이책을 넘어, 더 많은 사람과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선배님의 정성이 담긴 책을 보며, 나는 우리 세대가 가진 숙제를 발견했다. 기록되지 않은 지식, 디지털이라는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경험은 아무리 귀해도 세상과 연결될 기회를 놓치기 쉽다. 평생을 바쳐 쌓아 온 서비스 현장의 감각과 노하우가 단순히 개인의 추억으로 남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중한 자산들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다음 세대에게도 흐를 수 있게 하려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기록하는 존재'이자 '발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느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가치를 기록해 세상에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특히 내 가슴을 때린 한 문장이 있다.


"뗏목은 섬에 있을 때 만드는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로 떠밀려 나간 뒤에는 뗏목을 만들 수 없다. 현재 나를 고용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나의 효용감이 살아있는 지금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벽돌을 쌓아야 할 시간이다.


불완전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에 나를 증명할 소중한 자산이 된다. AI가 모든 것을 다 하는 시대라지만, 내가 겪은 현장 온도와 사람들의 눈빛은 오직 나만이 기록할 수 있는 고유한 콘텐츠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게 커뮤니티와 소통하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지만, 이 또한 내가 만들어야 할 뗏목의 일부다.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예의

아무리 성공한 이들도 그 시작은 형편없었다. 나이키의 창업자도,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이름난 작가들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실력으로 첫발을 뗐을 것이다. 그 서툰 시작이 있었기에 훗날의 위대한 자산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 역시 훗날 내가 돌아볼 가장 형편없지만 위대한 '시작의 기록'이 될 것이다.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내 미래에 대한 방치이며, 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2026년, 나의 방향은 정해졌다.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오늘부터 나의 시간을 증명할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려 한다.

지금, 나는 나의 뗏목을 만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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