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라는 직업, 커피 한잔의 예비율

현장으로 나가기 전, 나를 투명하게 닦아내는 정화의 시간

by 스윗비타




영어 가이드의 기다림, 그 사이를 채우는 에스프레소 한 잔


일정이 잡히면 하는 일이 참 많아진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패키지로 갈 땐, 손님의 입장에서 일정표를 보지만, 한국에서 외국 손님을 만나야 하는 가이드의 준비는 공항 미팅 동선부터 손님들의 특이 사항 파악, 식당 예약, 가야 하는 장소의 휴무일 체크까지. 사실상 일을 시작하기 거의 열흘 전부터, 아니 거의 한 달 전부터 나는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세심하게 파악해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미리 실수를 막고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싶어서다. 순발력이나 무지에서 오는 순진한 미소로 손님을 대하기엔 나는 이미 너무 원숙해졌고, 어느덧 의도치 않은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1분이 현장에서는 1시간의 낭비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합니다, 반가워요"라고 외우는 나만의 주문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일정 첫날이 되면 전날부터 잠을 설친다. 첫 만남의 장소로 가다 보면 설렘 반, 걱정 반이 섞인 묘한 기분이 든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를 사랑하면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태도가 바뀐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실제로 실행해 본 적이 있다. 크루즈 투어를 할 때면 엄청난 크기의 유람선에서 사람들이 차례대로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파도처럼 다가온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인파 속에 나와 함께 할 사람들이 섞여 있다. 나는 멀리서 내 버스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 재미있게 보냅시다. 갈 때 웃으면서, 사고 없이 무사히 가세요.”

그렇게 나의 고요한 기다림은 만남이 된다.



가이드의 절반은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가이드의 일은 한국을 소개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사이 꽤 많은 시간은 사실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손님이 체크인하고 다시 로비로 내려올 때까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자유시간을 주었을 때나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하루에도 몇 시간은 손님을 기다려줘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단순히 쉬는 게 아니다. 잠시 앉아 다리의 피로를 풀기도 하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지도를 들여다보고 부족한 가이드 멘트를 보완하려 인터넷 검색을 하며 보낸다. 가이드는 쉬는 시간조차 일을 하는 셈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유독 먼저 떠오르며, 그동안 나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수많은 커피숍이 생각났다. 특히 공항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어김없이 자리한 '초록색 별다방'은 가이드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아닐까? 직장인이 많은 길목에서 일찍 문을 열고,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며, 호텔 근처에서 가장 찾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 일찍 가서 머릿속 정리도 하고 잠을 깨우는 따뜻한 카페인을 주입하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아직 붐비지 않는 좌석을 찾아 앉아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주파수의 선율을 들으며 커피를 홀짝거리는 시간. 나에게 그 시간을 허락해 주는 자리와 찻잔의 온기. 언젠가 내가 이 일을 그만두더라도 이 평화로운 기다림의 순간만은 몹시 그리워할 것 같다.





공항 카페에서 엿듣는 낯선 이들의 세계


가끔은 공항 별다방에서 옆자리 외국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한국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설렘 가득한 계획이나, 여행을 마친 후 나누는 소회들. 방문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은 내가 보는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풍경에 감탄하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한국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느끼는 바가 많다. 비록 내 손님은 아니어도 그들의 대화는 나에게 새로운 공부가 되기도 한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손님 앞에 서야 할지, 그들이 진짜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투명인간의 포커페이스와 '행복 장착'


집이 서울 시내가 아니어서 그런지 나는 항상 최소 한 시간 전에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부지런하다느니 피곤하지 않냐 묻지만, 난 오히려 일 시작 10분 전에 후다닥 뛰어 들어와 활짝 웃는 동료들이 더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아침 10분이라도 더 자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시작하는 아침이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다. 긴 통근 시간과 스트레스, 피로로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날이 많다. 에스프레소 더블 샷을 확 털어 넣고 잠시 멍하게 앉아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질문하는 날도 종종 있다.


가이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인간이다. 완벽한 포커페이스가 아닌 다음에야 하루 종일 동행하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속에는 그날의 감정과 감각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한 번은 일하기 직전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시작한 날이 있었다. 말 그대로 망했다. 내 안의 날 선 감정이 손님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장착하려고 노력한다. 안 좋았던 감정이 있다면 카페에 앉아 모두 풀어버리고, 내려놓고 시작해야 한다. 아침의 커피 타임은 그런 나를 만드는 정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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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감과 시간을 살 수 있는 '합법적 쉼터'


나는 버스에서나 길에서나 예쁜 커피숍이 먼저 보인다. 산책길에서도 작은 커피숍을 발견하면 왠지 설레며 발길이 옮겨진다. 가이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온 손님들도 초록색 로고만 보면 안도의 미소를 짓는 것을 본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안정감이다. 만약 내가 북극 여행을 하다가 롯데리아를 발견한다면, 당장 달려가 평소엔 손도 안 대던 불고기버거를 가장 행복하게 먹어줄 것이다.

나에게 커피숍은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곳은 안정감과 시간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찬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 벚꽃이 흐드러질 때, 손님이 힘들게 해서 속이 부글거릴 때, 마냥 늘어진 일정으로 기다려야 할 때 나는 커피숍에 앉는다. 그곳은 익숙한 향기와 편안한 무관심이 공존하는 '합법적 쉼터'이자 '기분 충전소'다. 잠깐의 멈춤을 위해 커피 한 잔 값만 지불하는 곳이다.

가끔은 집에서 아무 할 일이 없어도 영화 ‘인턴’에 나오는 로버트 드니로처럼 멀쩡한 얼굴로 카페를 찾아가기도 한다. 기대 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편한 자리를 내어주는 따뜻한 카페 같은 가이드 친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잠시 멈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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