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고 누가 알아주랴, 관심을 줘야 관심받지!

지식의 양보다 마음의 온도가 중요했던 가이드의 현장

by 스윗비타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문장이 하나 있다.


"Nobody cares how much you know until they know how much you care." (사람들은 당신이 얼마나 아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 전까지는.)



언젠가 책에서 본 이 말이 계속 머리에 남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영어 가이드로서 누구보다 공감하기 때문이다.



처음 가이드 자격증을 따고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손님을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십 대였던 그때 내가 뭘 얼마나 알았겠는가. 자격증 시험 준비하며 줄줄이 외운 연도와 서울의 인구, 면적 같은 숫자의 나열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가이드가 알아야 할 내용은 끝이 없었다. 작은 반도 국가라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는 길고 화려하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다녀봐야 얼마나 다녔겠는가. 기껏해야 수학여행과 MT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해외여행도 그즈음에 시작되었기에 외국 손님들을 만나는 직업 그 자체를 주변에선 신기하게 생각했다.



가이드가 된 이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알아야 할 내용은 끝이 없다. 세상은 인터넷으로 하나가 되어 지식이 공유되고, 손님들의 여행 경험도 그만큼 넓고 다양해졌다.

요즘 한국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간다. 한류 열풍이 세계적이라지만 실제로는 일부 열성팬을 제외하면 한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가 중국 땅인지 묻거나, 북한이 어디쯤 인지도 모르고 그냥 오시는 분들도 수두룩하다. 공항에서 어색한 첫 만남을 하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까지, 이분들이 어떻게 하면 즐거운 기억을 가져갈까 고민한다. 기분 좋게 별 사고 없이 보내는 것이 가이드의 최종 바람이며, 덤으로 한국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성공한 것이다.




가이드들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심이 있다. 누가 언어를 더 잘하나, 누가 역사를 더 많이 아나. 실력 좋은 가이드가 되기 위한 바람직한 경쟁심이라고 해두자. 나 역시 한없이 부족한 실력에 문화와 역사 지식을 파고 또 파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나고 보니 큰 깨달음이 왔다.



“당신은 역사 교수님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온 여행사 직원의 말이다. 웃으며 던지는 말속에는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과연 손님의 표정을 제대로 읽고 있었을까? 그들이 진짜 뭘 알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하기는 했던가?'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대강하고 재미만 챙기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지적 호기심이 충족될 때 이번 여행이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만족은 뛰어난 암기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식의 양보다 마음의 온도가 먼저 전달되어야 한다.



그걸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곳이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요즘 이곳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장소다. 하지만 신입 가이드들에게는 구석기부터 구한말까지 방대한 시간을 넘나들어야 하는 두렵고 지루한 숙제다. 박물관을 보는 손님들도 두 부류다. 예술을 즐길 줄 안다고 믿는 부류와, 일정이니 오긴 왔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부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체 일정 중에서 중앙박물관에서 신세계를 본 듯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번 투어는 미국에서 온 독신 여성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기 센 언니들’이었다. 여성들이라 뷰티에 관심이 많고 음식도 까다로웠다. 유난스럽게 튀는 백인 자매를 보며 '이번 투어 험난하겠구나, 제발 컴플레인만 듣지 말자'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이들이 박물관을 다녀오더니 180도 변했다. 본인들이 예술을 사랑한다고 떠들기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지적인 여성들이 정말 좋습니다. 당신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피부로 스며 나온 것 같네요.” 작업 거는 남자도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것이 그들을 움직인 모양이다. 그 후로 그들은 어디를 가든 즐거워했고, 리뷰에도 가장 좋았던 장소로 박물관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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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를 시험하려는 손님들도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내 설명과 비교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나 이만큼 안다’는 과시용임을 알기에, 나는 일단 그의 지식에 놀라움을 표한다. “한국 역사에 이렇게 깊은 통찰을 가진 질문을 하는 분은 처음입니다.” 사실을 말해준 것뿐인데, 혼자 여행하는 은퇴 의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그 후 누구보다 내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가이드의 설명은 역사책과는 다른 온도로 다가가야 한다. 내 앞의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내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짧게 지나가는 표정, 미소, 반짝이는 눈빛에 내가 관심을 보이면 금세 보인다.

설령 내 설명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박물관 유물의 말을 통역해 주는 사람일 뿐이다. 한국에 온 이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운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계속 관찰하고 공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손님과 나의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이 가이드는 나를 신경 써준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결국, 안다고 누가 알아주랴. 관심을 줘야 관심받는다.






지식은 머리에 남지만, 관심은 가슴에 남는다는 것을 34년의 시간 동안 배웠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열심히 나를 증명하려 애쓰다 정작 상대방의 지루한 표정을 놓친 적은 없으신가요?

가끔은 내가 아는 정답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 주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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