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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강민 Salawriter Nov 21. 2020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마지막까지 받기만 한 손자의 편지

할머니.

지난여름의 어느 금요일 늦은 밤, 누나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어요.

언젠가 이런 연락이 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아. 알았어."

100세가 다 되어가는 할머니 연세만큼 저도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해 왔던 걸까요. 덤덤하게 답을 하고 서둘러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밝으면 할머니께 생전에 못 한 작별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니까요.




한 여름의 그날엔 비가 참 많이 왔어요. 살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어디에서 그렇게 쏟아지는지 곳곳이 물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만나러 가는 길에도 충북 지역에서 비가 눈앞을 가려서 운전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묻혀 계신 곳, 충북의 그 공원묘지에 할머니도 같이 모시게 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래서 거기 지날 때 비가 많이 온 건가...'

할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울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어디선가 들어본 말처럼, 하늘이 대신 울어준 건 아닌지... 괜히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할머니.

몇 달 전에 검은색 정장 한 벌을 샀어요. 가지고 있던 정장이 푸른색, 회색뿐이어서 문상을 갈 때마다 마음이 쓰였거든요. 나이가 드니 경조사 소식 중에서도 조사가 점점 많아집니다. 친척 어르신들, 지인의 조부모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많이 와요. 그래서 한 벌 샀습니다. 요즘은 편하게 티셔츠도 많이 입지만, 마지막 인사드리러 가는 길에 옷이라도 갖춰 입고 예의를 표해야 할 것 같아서 비싸지 않지만 단정한 것으로 준비했어요. 옷을 사면서 할머니 생각을 했었어요. 그렇게 준비를 했었나 봅니다.




할머니.

"우리 강민이 왔나."

방학에, 명절에 할머니의 품으로 달려가며 듣던 그 인사가 저는 너무 좋았어요. 언젠가, 저보다 작아진 할머니를 안아 주게 되었던 때부터 저는 점점 어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제가 할머니의 안부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어, 명절에 찾아뵙지 못하면 전화라도 드렸었죠.


유학 시절에 멀리서 드렸던 전화를 제일 반가워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귀국을 하고 나서 언젠가 하신 말씀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외국 살 때는 전화도 자주 하더니..."

제가 할머니께 가장 잘못한 일인 것 같아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제 조금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오히려 소홀했습니다. 그렇게 전화도 드리지 않고, 몇 번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전화 드릴 걸, 명절에 길이 아무리 막혀도 한 번이라도 더 뵈러 갈 걸.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도 그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제는 소용없는 후회겠지요.




장례식장이 있는 도시에도 비가 많이 왔었나 봅니다. 주차장 바닥 곳곳에 얕은 웅덩이가 있었어요. 차에서 내리는데 구두 안으로 물기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어요.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구두가 그 사이 삭아 있었나 봅니다.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밑창이 떨어져 나가더군요. 다른 분 장례식이었으면 결례가 되었을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근처 가게에 들렀습니다. 검은 구두를 샀어요.




할머니.

올해는 조사가 참 많습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후에도 몇 번 문상을 다녀왔고, 오늘은 운구를 하고 왔습니다. 이른 새벽에 구두를 꺼내 신으면서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할머니께서 선물로 주신 구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주가 도리를 잘하라고, 다음에 있을 중요한 때에 구두도 잘 갖춰 신으라고 주신 선물이라고요. 할머니께 다 하지 못한 도리를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선물로 주신 구두를 신고 앞으로 저의 도리를 다 하려고 합니다.


할머니. 저는 마지막까지 받기만 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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