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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텀 Apr 04. 2017

영화제 출신 자막가들이 모여 만든 스타트업

21세기 자막단

화려한 영화제 무대 뒤에 가려진 존재들이 있다. 영화를 수급해오고, 이를 상영하기 위한 기술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행사를 운영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1등을 하는 이들이 바로 ‘자막 편집자’다. 이들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조용히 작업한다. 실제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해당 영화의 자막 작업을 누가 했는지 모르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각국의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에서, 자막 없는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영화와 관객 간의 소통은 단절될 것이다.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된 기분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자막가는 영화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이들의 유통 기한은 3개월이다. 단기 계약직 형태로 고용되기 때문이다. 내년에 같은 영화제에서 일할 수 있을지는커녕, 다음 달에 일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18년 차 자막 편집자인 김빈 대표는 영화를 실컷 보고 싶어 영화제 자막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3개월 동안의 작업이 끝나면 훌훌 털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꿈같은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함께 일하던 선배와 동료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생계의 문제 때문이었다. 김빈 대표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21세기 자막단’이다.


21세기 자막단 김빈 대표


■ 3개월짜리 영화제 자막가…더 오래, 덜 불안해하며 일하고 싶었다 


18년 차 자막 편집자라고 들었다. 


21세기 자막단을 창업했던 시점엔, 전 영화제 사무국을 통틀어 경력이 제일 많은 사람이 나였다. 영화제 자막가들은 보통 3, 4개월씩 단기직으로 계약을 하기 때문에 고용이 불안정하고, 보수도 많이 받질 못한다. 그래서 함께했던 선배, 동료들이 많이 그만뒀다. 자막 분야는 노하우를 가진 경력자들이 필요한 직종인데, 현실적으로 이 일로만 생계를 유지하거나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기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로 채용이 이루어지나. 


영화제에서는 프로그램팀, 자막팀, 기술팀 등이 필요한데 사무국 측에서 채용 공고를 내거나 전년 도에 함께 일했던 팀장과 재계약을 맺는다. 그럼 그 팀장 개인이 팀을 꾸려서 데려오는 형태다. 1년 내내 사무국 내에서 상시 근무하는 건 사무국장, 프로그램팀, 회계 담당자 정도다. 영화제가 보통 봄부터 가을까지만 열리기 때문에 겨울에는 일이 없다. 현재 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 다음 일을 하게될지에 대해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보수는 어느 정도인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신입의 경우 보통 월 100만 원 초반대에서 일을 시작한다. 팀장이 되어도 보수가 그리 높진 않다.


풀고자 하는 문제가 있어도, 창업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21세기 자막단이 하나의 팀이자 기업이 되었을 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나. 


좋은 일이라서 시작한 것도, 시장이 확실히 보여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단지 영화제 일을 계속하고 싶은 동료들이 많은데, 그게 불가능한 구조라서 개선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이 주제가 ‘고용 불안정’이라는 사회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었고,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기업’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 거다. 나와 동료들이 일을 오래, 안정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각개전투하던 자막가들이, 기업에 속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나. 


예를 들어 내가 속했던 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자막가가, 다른 팀에 가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푸대접을 받았던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경력이 제일 많은데도, 어린 직원에게 그 수준의 연봉을 준 적이 없다며 처음과 말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회사 형태가 되면 그런 식의 부당한 대우를 함께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또 회사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영화제 이외의 작업이 꾸준히 들어오기 때문에 1년 내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자막팀이 하나의 기업이 된 경우는 21세기 자막단이 최초인가. 


영화제 자막팀이 회사가 된 건 처음이다. 기존에는 번역을 중심으로, 텍스트 원본을 만드는 회사와 이걸 재가공하는 회사가 프로덕션 형태로 따로 존재했다. 이 두 작업을 한꺼번에 소화할 수 있으면서, 영화제 일도 같이 할 수 있는 팀은 우리가 처음이다.


자막가 개개인이 기업이라는 형태를 통해 조직화됐을 때, 기존 업계의 반발은 없었나. 


처음에는 함께 일하던 사무국장들도 우리가 수익을 낼 수 있겠느냐고 걱정했다. 자막가 집단 한쪽에서는 우리가 회사가 되면, 일을 다 뺏어가는 게 아니냐는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사무국 측에서도 결국 노하우가 많은 사람을 빨리 구하는 게 최우선적인 과제다. 그들이 나서 일일이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우리 같은 회사에 맡겨버리는 걸 더 편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지금은 많은 영화제에서 외주 형태를 선호하고 있다.


수익 구조는 어떻게 되나. 


보통 장편 영화의 경우 200~300만 원 수준의 보수를 받는다. 현재 우리 수익은 80%가 영화 자막 제작에서, 자체 기획 영화제에서 20%가 나고 있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2천 여 편의 영상의 자막을 제작했다. 초기에는 영화제 일만 했었는데, 요즘에는 온라인 무크(MOOC, 전 세계 유명 대학 강의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교육과정)나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컨텐츠 작업도 늘었다. 작년에는 선데이토즈의 게임 자막 작업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자막이란, 영화가 끝난 뒤 기억에 남지 않는 자막


많은 자막 작업을 했는데, 21세기 자막단이 정의하는 ‘좋은 자막’이란 무엇인가. 


영화가 끝났을 때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자막이다. 영화가 100분이면, 그중 가장 많은 시간 등장하는 게 자막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이 영화 좋다’ 해야지, ‘이 자막 좋다’는 말이 나오면 안 된다. 자막가로서 늘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영화를 관객에게 잘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너무 오버해서도 안 되고, 감독의 의도보다 덜하게 표현해서도 안 된다. 그 적정선을 찾아내는 게 항상 고민이다.


최근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외화에서 등장인물인 할리퀸의 대사 번역 건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자막가가 젠더, 정치 등 사회적 이슈에 눈 감고 있어 발생한 사고였다. 


사실 이런 삐끗한 결과물들은 두 집단 중 한쪽이,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며 반대편을 저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사회적 인식을 해결하는 건 우리 회사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21세기 자막단은 기존에 저평가됐던 존재가,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탄생했다. 처음엔 자막가 동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그 범위는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논란이 있는 지점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많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여성이든 노동자든 그게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또 이들이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마땅히 신경 써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감을 선택할 때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고. 


일을 제안하는 영화제 사무국이나 배급사가 우릴 먼저 선택하긴 하지만, 우리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작업 여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때때로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미 환경 영화제와 일을 하고 있는데, 원자력 공사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회사로부터 작업 요청이 들어온 경우가 있었다. 그땐 제안을 거절했다. 맞냐, 틀리냐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 작업을 선택할 거냐, 안 할거냐의 문제다. 이런 일이 자주 있진 않고, 1년에 한 번 정도 있다. 


■ 인공지능은 자막가의 일을 뺏어갈까?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기자와 자막가 모두 인공지능(AI)이 대체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다. 이에 대해선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우리도 종종 이야기 나눈다. 충분히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다량의 정보를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고 있는 직업들부터 바뀌게 될 것이다. 창작과 예술 분야는 변화가 더딜 거라고들 했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AI가 쓴 소설이 문학상 심사를 통과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두렵진 않다. 많은 부분을 AI가 대체하더라도, 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 업이 생겨나고, 필요했던 이유는 동일하다. 다만 이를 수행하는 형태가 바뀌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손으로 짚신을 만들던 사람이, 지금은 운동화 기업의 공장에서 다른 형태의 노동을 하고 있다. 이전의 번역 업무는 외국어를 많이 배운 사람만의 독점적 권력이었다. 기술은 이 권력을 보편화할 것이다. 그렇게 좀 더 많은 사람이 번역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좀 더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원하게 될 것이다. 자막가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역할이자 가치라고 본다.


기술은 작업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기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국내 컨텐츠가 실시간으로 해외에 송출되기도 하고, MCN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며 일거리도 늘어났을 것 같은데. 


MCN 쪽은 작년부터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몇몇 기업과 얘기는 오고 갔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적은 없다. MCN 분야의 영상은 빠르게 작업을 마쳐서, 거의 실시간으로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기존에 했던 작업이랑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와 성격이 맞는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해외 영상 스트리밍 기업과의 작업 가능성은 없나. 


넷플릭스 등은 몇 개 업체와 고정 계약을 맺고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우리도 분야를 확장하기 위해, 그런 파트너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는데 현재는 찾지 못한 상태다. 기회가 되면 함께 작업 하고 싶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중국 등 타국으로 내보낼 때에 필요한 다국어 작업에 더 관심이 많다.


현재 21세기 자막단에서 작업이 가능한 언어는 몇 가지인가. 


기본적으로 5, 6개 언어의 번역 작업이 가능하다. 다른 언어가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 프로젝트마다 각 언어 전문 번역가와 계약을 맺어서 진행한다. 


■ ‘자막가’와 ‘자막가의 일’을 새롭게 정의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처음 창업할 때, 우리가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업계 종사자가 많았다. 하지만 21세기 자막단은 살아남았다. 또 이전에 우리가 회사를 만들어 일감을 다 빼앗아갈 거라고 비방했던 상대편도, 지금은 회사를 만들어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나가는 일들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 업계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고 본다. ‘자막가’라는 직업과 ‘자막가의 일’에 대한 정의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이전엔 오롯이 자막을 만들어 극장에서 트는 일까지만 자막가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업 이후 컨텐츠를 확산시키는 범위로까지 우리의 일이 확장되고 있다. 또 이전엔 영화 작업을 수급하는 프로그램 팀과, 자막팀의 역할이 확실히 나누어져 있었다. 영화 작업이 들어오기 전까지 자막팀은 할 일이 없었고, 작업을 넘기고 나면 프로그램 팀이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일을 한 팀 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면, 결과물의 질도 높아지고 자막가는 1년 내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21세기 자막단 내의 자막 단원들은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상태다. 올해엔 이 모델을 좀 견고하게 만들려고 한다.


직접 자체 영화제를 기획하고 상영하는 것도, 자막가의 역할을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인가. 


그렇다. 우리가 작업한 것 중, 더 많은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를 선별해 ‘메이킹 필름 영화제‘를 개최한다. 이외에도 지금까지 66개의 기획전을 개최했다. 이전에 네팔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작은 영화제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한 NGO 활동가 분과 공동 기획했던 것인데, 네팔 현지의 환경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도 참여를 했었다. 당시 환경과 관련된 애니메이션을 여러 편 상영했는데, 우리가 떠난 후 해당 학교로부터  영화로 환경 교육을 할 수 있는 지 처음 깨달았다면서 학교 내에서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냐는 문의를 해왔다고 한다. 이처럼 영상 매체는 그 파급력이 크다. 우리는 세상의 저평가된 것들을 조명하기 위해, 자막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언젠간 자막이 아닌 다른 것을 도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난 21세기 자막단이 큰 회사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다만 어디에나 있는 회사가 되고 싶다. 미국에도, 인도에도 소규모 21세기 자막단을 세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지켜봐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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