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잡썰] Ep18. 야구의 낭만이 증발했던 순간

야구잡썰 Ep18. 팬이 만들 수 있는 폭력에 관하여

지난주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는 이대호의 은퇴 투어가 있었다. 주인공 이대호와 함께 유독 한 선수가 눈에 밟혔는데 오랜 시간 롯데에서 뛰었던 강민호였다. 종종 느슨한 플레이와 아쉬운 프레이밍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강한 공격력으로 팬을 설레게 했던 포수. 덩달아 그의 넉살과 사람 좋은 웃음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팀의 분위기를 올리는 모습도 무척 좋아했다. 비교적 가벼운 이미지와 리그 우승이 없는 탓에 여러 부분에서 저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역대 한국 프로야구 내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포수라 생각한다.


지금은 삼성에 있지만, 강민호 역시 롯데의 상징 같았던 선수다. 뛰어난 장타력을 바탕으로 자이언츠의 화끈한 야구의 선봉에 있었고, 긴 시간 안방도 든든하게 채워줬다. 국가대표에도 다수 뽑히는 등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자이언츠의 자랑이기도 했다. 유쾌한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던 슈퍼 스타. 그런 선수가 두 번째 FA 때 팀을 떠났고, 경기장 안팎으로 그 충격은 꽤 컸다. 지금까지도 롯데는 그의 포수 자리를 채울 선수를 못 찾았고, 자연스레 팀 성적도 늘 좋지 못했다. 팬들의 아쉬움도 어마어마 했다. 주인 잃은 47번 유니폼이 사직엔 너무도 많았고, 귓가에 울리는 그의 응원가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강민호는 그런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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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스포츠엔 이런 믿기 힘든 이적이 종종 있다. 선수가 자신의 가치를 더 인정해주는 팀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선수 개인의 목표를 위해 이적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래도 팬은 사람이기에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이성적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제까지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의 이름이 상대 팀 응원석에서 들려올 때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사랑과 낭만이라 믿었던 순간이 부서지는 건 혼란스러운 경험이고, 우리의 심장이 타팀에서 뛰는 걸 본다는 건 아픈 일이다. 그래서 억한 마음에 누군가는 배신자라고 말하기도 하고, 종종 과한 표현으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이런 마음이 잘못 표출된 순간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았던 강민호의 타석이 왔다. 그의 등장곡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는 롯데 시절과 같았기에 과거의 추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삼성 응원석과 함께 그 노래를 불렀고, 마음이 묘했다. 몇몇 팬은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에 남은 그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각났던 낭만이란 게 다시 붙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스포츠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소중한 순간.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 이는 곧 민망함으로 얼룩졌고, 스포츠에 기대했던 뜨뜬 미지근한 것도 차갑게 식고 말았다. 이날 강민호는 첫 타석에서 병살을 치며 삼성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롯데 팬들은 환호했다. 거기까지면 좋았겠지만, 응원석에선 낯익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민호의 롯데 시절 응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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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응원석 앰프가 정상 작동하지 않아 소리가 비어있던 그 순간, 관중석에서 흘러나왔던 강민호의 응원가. 가벼운 농담처럼 넘길 수도 있지만, 재미있는 광경으로 생각하기엔 씁쓸했다(이런 역 응원가 문화가 익숙했다면 유쾌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생소한 광경이었다). 상대 선수의 아쉬운 플레이에 응원가를 부른다는 건 대놓고 놀리겠다는 거다. 타팀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눈앞에서 조롱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 아닐까. 그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플레이를 놀리는 일이고, 그건 무고한 이에게 향했던 하나의 폭력이다. 프로 스포츠에서 팬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최고의 권력자들이 한 선수를 놀리고 수치심을 준 거다.


아마도 한두 사람의 장난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익숙한 멜로디에 주변의 관중도 반응하며 떼창이 되었을 것이고. 이를 조롱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비극이었고, 롯데 팬이자 강민호를 응원했었던 한 명의 팬으로서 창피한 순간이었다. 더구나 이날은 자이언츠의 자존심 이대호가 라이온즈 파크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다. 순위 경쟁으로 전쟁터인 야구장 안에서 틈날 때마다 한 레전드의 마지막을 추억하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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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아닌 것에서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이 경기를 저 한 번의 조롱이 망치고 있었다. 심지어 강민호는 이날 옛 동료였던 이대호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하며 뭉클한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 오늘은 적이지만, 동료로 지냈던 날이 훨씬 많은 두 사람이 교감하는 순간은 재미있으면서도 애틋했다. 그런 행동을 보여준 선수를 향한 일부 롯데 팬들의 대답이 조롱이었다는 것이 씁쓸했다. 경기 후 라이온즈 파크에 모인 야구팬 모두가 목놓아 부른 이대호의 응원가를 무안하게 만들고, 스포츠의 감동과 낭만을 짓밟았던 한 번의 행동. 무심결에 울려 퍼진 그 응원가는 우리의 야구를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