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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가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비극적인 방식

'미키 17' 볼까, 말까?

죽음 뒤에도 부활이 보장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안정감 속에 세상을 즐기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두려움 없이 위험한 일에 맘껏 도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죽음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조건이 추가되면 사뭇 느낌이 다르다. 죽음의 감각을 알기에 더 위험을 피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을 치료하는 치과조차 공포심 때문에 피하려는 걸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보다 더 궁금한 건 이런 인간을 주인공으로 봉준호 감독이 보여줄 이야기다. 그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졌을까.


<미키17>은 죽으면 몸이 재생되고 기억 데이터가 이식돼 삶을 지속하는 ‘익스펜더블’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이야기다. 미키는 우주 개척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우주선에서 인간이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을 대신하며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17번째 미키는 외계 생명체를 조사하던 중 그들에게 습격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미키 17은 우주선에 복귀하지만, 그가 죽은 줄 알고 18번째 미키가 복제된 상황.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발각되면 폐기되고,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미키들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면서 여태 생각하지 않았던 삶의 유한성과 진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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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 바로 부활한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다. 국내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중에는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 제시카 로테 주연의 <해피 데스데이> 등이 있다. 하지만 <미키 17>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설정을 다루는 방식은 앞의 두 작품보다 훨씬 슬프다. 앞의 두 작품의 캐릭터가 죽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학습하고 목표를 위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면, 미키는 실험용 생쥐처럼 실험 대상이 되거나 생명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 일에 투입된 뒤 소모된다. 즉, 미키는 죽음 자체가 목적이며 이 과정을 통해 학습하는 건 죽음의 고통뿐이다. 이 인물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복제 인간과 인간의 존엄성을 묻는 듯 보였다.


하지만 <미키 17>은 '익스펜더블이 인간이 맞는가?' 같은 과학·윤리적 질문에는 생각보다 관심이 적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 등의 작품을 통해 소시민의 삶을 말해왔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우주라는 무대, 그리고 할리우드라는 제작 환경 속에서도 여전했다. <미키 17>의 카메라도 사회적 약자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진다. 빚 때문에 익스펜더블이 될 수밖에 없던 미키는 우주선 내에서 도구적인 존재 인정받을 뿐, 그의 행복과 삶 자체는 타인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인체에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고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미키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혹사당하고 부속품처럼 교체되는 현시대의 노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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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소시민의 삶과 함께 관심을 가져왔던 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는 상류층의 탐욕이다. <미키 17> 역시 마셜(마크 러팔로)을 통해 독재자를 희화화하면서 상류층을 향한 풍자를 담았고, 덕분에 블랙 코미디로서 웃음을 주는 순간을 다수 만들어 냈다. 이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사회 계층을 보여주는 건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키 17>이 권력과 권력자를 보여주는 방식은 <설국열차>보다 더 강렬하다. <설국열차>는 열차 칸에 따라 기계적으로 구분된 계층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반면, <미키 17>은 같은 공간 안에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고, 동시에 구성원이 동의한 권력자가 자연스럽게 이득을 취하며 구성원을 착취한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더 유사하며, 교묘한 권력의 작동방식처럼 보여 더 섬뜩하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약자를 향한 따듯한 시선, 그리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를 볼 수 있던 영화다. 물론, 비교적 아쉬움을 느낄 관객도 있을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왔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날카로운 느낌이 줄었고, 재치 있는 표현 등이 줄어 전체적으로 무난해 보이는 면도 있다. 할리우드라는 거대 자본과 시스템 속에서 전 세계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안정적인 선택을 다수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범하지 않고, 바뀐 환경 속에서도 봉준호라는 인장을 새겼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과 능력을 엿볼 수 있어 즐거웠다. 관객을 위해 봉준호 감독만이라도 여러 명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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