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아 May 11. 2023

하마터면 결혼할 뻔했다

파혼 후 11개월

가 많이 내리던 날, 친구 L과 만났다.


"뭐 먹을래?"

"청국장."

"콜."


저녁 메뉴는 속전속결로 정해졌다. 맥락 없는 메뉴 선택이 아무런 저항 없이 승인되었다.

비릿한 비 냄새를 덮는 꼬릿한 청국장 냄새가 지독하게 입맛을 당겼다. 제육볶음에 도토리전도 곁들이니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청국장에 비빈 밥을 크게 떠서 제육볶음을 올려 와앙-하며 먹는 나를 힐끔 보더니 L이 우물거리며 대충 물었다.


"야, 너 살쪘지?"

"응. 티 많이 나?"


실제로 작년 가을에는 허리가 헐렁거던 바지가 지금은 꽉 낄 정도로 살이 쪘다. 그때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결혼준비 한다고 다이어트 중이었을 텐데. 몸매 관리한다며 이렇게 맛있는 청국장과 도토리 전과 제육볶음을 풀떼기만 먹고 있었겠지. L은 내 결혼식 축가를 불러주기로 했었다. '내 결혼식'이라니. 지금은 꿈결같이 느껴지는 말이다.


"야, 너 자칫하면 지금 노래 연습해야 될 수도 있었어."


킥킥. L도 웃고 나도 웃었다. 파혼 후 11개월. 이제는 농담 삼아 꺼낼 말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마터면 내 남편이 되었을 뻔했지만 지금은 남이 된 그 사람. 내가 아니어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많다던 그는 지금도 그렇게 자신만만한 모습 그대로일까.



떠나보내는 마음이 쉽지 않았으니
부디 떠나는 마음도 어려웠길.



비 오는 날, 청국장 먹다가 괜스레 아련해지는 것이 뜬금없 우습기도 하다. 웬 청승이람. 한동안 그렇게아파하던 순간들은  한낱 지나간 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살이 아니라 행복이 찐 거야."

"응, 지금이 훨씬 나아."


무심하게 던지는 L의 말에 "그래애?" 하며 킥킥 웃었다. L이 턱으로 길 건너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켰다.


"후식은 아이스크림. 어때?"

"극락인데?"


나의 빠른 대답에 L도 킥킥 웃었다. 단꿈 같던 결혼은 결국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치 나의 세상이 끝난 것 같았는데, 파혼 후에도 여전히 나의 일상은 꽤 재미있다.


청국장은 푹 삶은 콩을 더운 방에서 꾹 띄워 만든 된장의 한 종류이다. 냄새는 좀 나더라도 입맛 당기는 청국장이 되기 위해서는 발효를 시켜야하 듯, 기억도 추억이 되려면 수고와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꾹꾹 눌러 담은 '불행'은 잠시 지나가는 상태에 불과해지는 때가 온다.


청국장이 기가 막히게 맛깔나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혼했는데 어쩌라고요] 매거진 구독자 분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