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여행에서 매일 아침 건강 확인은 필수였다. 다행히 모두 크게 힘들지 않게 만족스러운 'P'의 여행을 즐기는 중이다. 낯선 곳에서 '오늘은 또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해볼까?' 생각하고 정하는 건 꽤나 신나고 설레는 일이었다. 아마 여행작가로 일하러 온 거였다면 부담감 때문에 이처럼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을 거다.
우리는 매일매일 도쿄의 여러 가지 얼굴을 만났다.
까막눈의 심정
지금껏 러시아를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던 건 언어가 크게 작용했다. 내가 필요한 걸 소통할 수 있고 읽을 수 있어 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지는 예외다. 사실 일본어는 어릴 적에 좀 배워보겠다고 수없이 들춰보다 결국 히라가나도 익히지 못했다. 사방에 적힌 일본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한 건 당연지사. 그나마 아는 한문이 눈에 들어오면 뜻이나마 대략 알겠는데, 한때 한문왕이었던 나도 학생 때 암기력 덕만 잠깐 봤을 뿐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미치도록 해석해내고 싶다
아, 러시아어 모르는 여행자가 현지에서 러시아어를 보며 느끼는 갑갑함은 이런 거겠구나. 까막눈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어를 알면 현지에서 더 많은 걸얻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게 되지 않아아쉬웠다. 한문이라도 눈에 들어오는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또 우리와 비슷한 발음이나 유사한 단어도 꽤 있어 유추도 가능하다. 러시아에서 시귄 일본 친구들과 나눈 간편 회화도 아직은 좀 기억이 난다. 거기다 한자는 부모님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궁금하면 여쭤볼 수도 있었으니, 여행 내내 우리만의 집단지성이 동원되었다. 그뿐이랴. 스마트폰 번역과 통역 기능도 기막히게 활용했다. 물론 해석은 조금 요상스러워도 대략적인 판독이나 소통은 가능해 유용했다.
옛 랜드마크가 된 타워
서울에 왔으면 남산 서울 타워에, 도쿄에 왔으면 도쿄 타워에!
현업 시절 출장으로 도쿄에 여러 번 오신 아버지는 오랜만의 방문에 '랜드마크 도쿄 타워는 가봐야지!' 라며 주저없이 필수 코스로 정했다. 도쿄 타워가 있는 롯폰기 지역으로 출발. 마침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가 나왔다. 롯폰기는 한자로 '육본목(六本木)'.... 하하.
도쿄의 랜드마크 도쿄 타워
도쿄 타워. 얼핏에펠탑과 비슷한 모습인데, 붉은색과 흰색외관이 특징이다. 1958년 건설되어 방송탑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관광지 역할만 하고 있는 것 같다. 높이는 250m인데,솔직히 이보다 더 높은 도쿄 스카이트리(450m)가 도쿄 북동부에 2012년 생긴 이후 새 랜드마크로자리매김하면서 도쿄 타워의 인기는좀 분산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랜드마크 도쿄 타워를 택했다.영화나 TV에서 접한 기억이있어서인지 더 애정이 간다.
멀리서 바라본 새 랜드마크 도쿄 스카이트리.
도쿄 타워 메인 데크
우리는 메인 데크까지만 가려다 기왕 온 거꼭대기까지 가보기로 했다. 꼭대기 투어는 시간별로 이루어졌는데, 타워 관련 짤막한 영상으로 시작해서 올라가면사진도 찍어주고음료도 제공된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거울이반사되는 전망대에서도쿄를 둘러보는시간이 주어진다. 메인 데크보다는 훨씬 높은 장소라, 보는 맛은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전망만 보면 이곳이 도쿄인지, 다른 나라 여느 대도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건물이 많은 그냥 도시 모습이라 도쿄의 특색을 잘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건물들 사이로 도쿄 타워가 뚜렷이 보이는 그림이 더 멋있지 않을까.
옛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도쿄 타워의 명성이 스카이트리에 많이 밀리지 않기를.
도쿄 타워 꼭대기에서 본 풍경
이곳은 도쿄인가, 뉴욕인가
도쿄는 명소가 참 많다. 저녁마다 어디 갈까 지도를 펴고 연구했는데, 부모님의 컨디션에 따라 최대한 동선은 복잡하지 않아야 했다. 오늘의 테마는 '대도시' 콘셉트. 먼저 지하철로 환승없이 가는 시부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이 부딪힘 없이 동시에 건너가는 스크램블 교차로가 궁금하기도 했고, 도쿄 번화가를 체험하고자 한 목적이었다.
시부야 교차로 건너려고 대기중인 사람들
시부야는 지하철역부터 노선과 출구가 많아서 매우 복잡했다. 오전이라고 인파 행렬이 적지는 않았다. 우리도 스크램블 교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사람 구경을 실컷 했다. 시부야 스타벅스 2층에서 교차로가 잘 보인다기에 찾아 갔는데, 이미 사람들로 넘친다. 빽빽한 서양 관광객들로 이곳이 도쿄 맞나 싶을 정도다. 주문 대기줄을 보니 커피는 마실 엄두조차 나지 않아, 2층 명당에서 스크램블 교차로만 잠시 구경하고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교차로의 규모가 사진과 화면으로 봤던 것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아서 살짝 아쉬웠다.
스타벅스 2층서 바라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시부야에서 로제의 '아파트' 노래가 울려 퍼진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케이팝이 일본 번화가를 흥겹게 해주고 있으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아파트 노래와 함께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은 다수가 외국인, 역시 시부야는 자국민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도쿄의 명동이었다.
시부야 풍경
사람 많은 곳을 피해 색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무인 전차가 다니는 유리카모메선을 타고 오다이바로.(유리카모메는 도쿄 서브웨이 패스가 통하지 않아 따로 표를 사야 한다.) 무인 전차를 타는 것도 신기한데, 도심에서 인공섬으로 향한다는 것도 특별했다. 오다이바는 원래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포대로 시작되었고, 인공섬으로서 현재는 도심의 혼잡함을 분산시키는 한편 특별한 풍경을 보여주는 복합 여가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해변 공원과 대형 쇼핑몰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
유리카모메선 운전석 없는 열차
오다이바 자유의 여신상과 레인보우 다리, 그리고 해변 공원. 이곳은 도쿄인가 뉴욕인가
특히 오다이바 해변 배경으로 자유의 여신상과 레인보우 브릿지를 보면, 미국에 온 기분이 든다. 여기가 뉴욕이 아닐까 잠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보이는 게 진품은 아니지만!
특별히 오다이바의 야경은 다리가 아파 빨리 복귀하고픈 부모님의 발목을 잡을 만큼 멋지다. 외국에 왔다는 것을 한껏 실감하고 싶을 때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이다. 이곳은 나도 두 번째 방문인데도 역시나 낭만적이다. 부모님도 그 낭만을 느끼셨기를.
멀리 도쿄 타워까지 보이는 오다이바 야경
오다이바 낭만 산책
잘못 든 길에 만난 미래도시
야경까지 야무지게 보고 오다이바에서 숙소 돌아가는 길. 시오도메 유리카모메 라인에서 지하철로 환승하려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길이 두세 갈래로 나있고 보이던지하철역 표지판이 조금 더 가니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구나를 직감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이미 부모님과 함께 먼 길을 걸어와버렸다.
시오도메의 건물숲
그런데 길을 잘못 들면서도 당황하거나 힘든 기색은 없었다. 우리 눈을 빼앗은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현대적 건물 사이사이로 다니는열차, 보행자 전용 공중 다리, 건물 아래 지하로시원스럽게 펼쳐진 광장 속 카페와 레스토랑, 건물 유리 너머 오피스 조명에 비쳐 보이는 비즈니스맨들... 이건 마치 미래도시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도쿄의 완전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며 우리 셋은 놀랐다.
도쿄는 참 많은 얼굴을 가졌구나!
길을 잃었는데도 새로운 구경을 하게 되니 오히려 좋았다. 이게 'P'식 여행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마주오는 행인에게 지하철역 가는 길을 일본어 반, 영어 반으로 어렵사리 물었다. 마스크를 턱에 걸친 아저씨는 바삐 귀가 중인 것 같았는데, 귀찮은 내색 없이 자기를 따라오라며 적극적으로 길을 알려준다. 말이 안 통하니 직접 가서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손짓을 해가면서 정확히 확인한다. 그의 친절함에 고마워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를 연신 내뱉었다.
살짝 맛 본 미래도시
계획에도 없던 미래도시 관람에, 친절한 일본인까지 만나다니!완전 럭키였다.
여행의 완벽한 마무리
짧은 도쿄 즉흥여행도 무사 귀가까지 해야 끝난다. 나리타 공항에 가는 여정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평일인데도 어딜 가나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도 넉넉히 잡고 출발했는데, 사람과 짐 사이에 끼어서 온 탓에 공항에 도착하니 녹초가 됐다. 다행히 열차에서 부모님은 미리 착석시켜 드렸기에 망정이지, 끝이 괴로울 뻔했다.
집으로 가는 길
피곤해서 기내에서한숨 잘까 했는데 왠지 영화를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왔어>. 한때 인기많은 작품인 걸 알고 있었고, 마침 일본에 다녀오는 길이니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생각했다. 사실 학생 때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희망했는데 인연이 안 됐었다. 러시아어 전공을 한 이후로는 유명 애니메이션만 몇 봤을 뿐,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무관심하게 살던 나다.
그런데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그래, 일본 애니메이션 감성이 이런 거였지' 다시금 떠올랐다. 무엇보다 일본 자연 재해를 주제로 한 스토리에서 놀랐다. 나도 예전부터 일본 여행은 자주 하고 싶었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지진 때문에 기피했었다. 이번 여행 동안에도 혹시라도 모를 지진을 우리가경험하지 않길 바랐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지진을 불러 일으키는 힘을 막기 위해 뒷문을 잠그러 다니는 청년 소타와 갑자기 그의 일을 돕게 되는 고등학생 스즈메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사람들은 늘상 지진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사는데, 희생과 아픔이 있더라도 결국은 모두가 일상을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왔어>(출처: 네이버)
영화에서 스즈메는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 도쿄까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녀의 여정을 지켜보며 일본 풍경과 사람들, 대중교통, 그곳의 문화까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온전히 일본이 녹아 든 작품이라서, 영화로 이번 여행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물론 부모님이 만족해 하셨으니 그걸로 이미 됐지만!
도쿄 도시 속 한그루의 나무
'J'의 'P'식 도쿄 즉흥 여행이 끝났다.
여행은 늘 계획이 있어야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시작하는 것도 참 설레는 일이다. 여정 중예상하지 못한 새로운선물을 발견할수도있으니 말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길가의 아름다운 꽃처럼평소에는 보지 못했던것을 봄으로써행복해지는경험, 그것이 즉흥 여행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