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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mesilver Jan 08. 2020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


게임은 선생님이다. 재미는 그저 학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게임 개발(특히, 기획)쪽 업무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너무나 유명한 책입니다. 저는 그 동안 소문만 듣고 읽어 보지 않다가 최근에 게임 디자인 쪽 업무에 대해 알아야 할 일이 생기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 글자수가 많지 않고 매 페이지마다 재미있는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얼핏보면 아이들이 읽을만한 가벼운 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꽤 진중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책 자체는 재미있게 술술 읽힙니다).


저자는 무려 '울티마 온라인' 의 리드 디자이너 출신으로서 그야말로 온라인 게임 분야의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했던 기조 연설을 토대로 살을 붙인, 게임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 식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게임이란 무엇인지, 왜 사람들은 게임을 하는지, 게임은 왜 재미있는지 (그리고 왜 어떤 게임은 지루한지), 게임은 예술로써 인정받을 수 있을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할지 등에 대해 인지심리학, 진화심리학, 교육학, 철학, 음악, 심지어 위상 수학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폭넓은 분야의 자료를 근거로 하되, 어렵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내고 있어 마치 대가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게다가 곳곳에 내용과 기발하게 연계되는 삽화들이 책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놀이나 게임을 재미있어하는 것은 생존 기술을 쉽게 익히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생존 기술을 익히는 것을 어려워 하거나 재미없어 하는 사람들은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실패한 반면, 기술을 익히는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존에 성공하여 자손을 남김으로써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죠. 

때문에 우리가 즐기는 게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생존 기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물의 패턴을 파악하거나 기억하기 (퍼즐), 순간적인 판단이나 반사 신경 익히기 (슈팅 게임이나 결투 게임) 와 같은 1차적인 기술 뿐 아니라 조직을 결성하고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등의 사회 기술 (이를 테면, 체스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조직 구성원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현재 상황에서 어떤 구성원을 살리고 어떤 구성원을 없앨지 우선 순위를 정하는 기술을 무의식 중에 배우게 됨) 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속성은 대부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에 대한 학습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즉, 게임의 재미라는 것은 생존 기술을 익히고 숙달하게 되는데에서 얻는 쾌감입니다. 


재미를 느끼려면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저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학습 요소 역시 다양합니다. 또한 내가 현재 도달한 익숙한 수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게임에서 제시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죠. 결국 모든 사람에게 재미를 주는 게임은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져서 재미없어지는 것이 모든 게임의 운명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비관적이라기 보다는 게임이 갖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유저가 이탈하는 것이 온라인 게임의 숙명이겠죠...


한편,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게임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핵심 요소를 뜯어보면 비교적 단순한 몇 가지 디자인적인 패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위상 기하학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위상학적으로 보면 공은 다면체와 같지만 도넛과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게임 역시 겉으로 보기엔 서로 다른 게임이지만 디자인적인 특성을 분석해 보면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게임이 많습니다. 가령, 책에서 저자는 격투 게임을 예로 들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격투 게임은 아래와 같은 5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물리적 이동 없이 단 한번에 승리가 결정나는 게임 (예: 가위바위보)

적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만 있는 게임 (예: 스트리트 파이터)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싸우는 게임

3D 형태를 갖되, 서로 마주보고 싸울수만 있는 게임 (예: 버추얼 파이터)

3D 형태로 갖고 상대방의 옆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게임 


많은 게임들이 실상 이렇게 위상학적으로 볼 때 기본 뼈대가 되는 요소 (이것을 저자는 '루뎀'이라고 칭함) 가 동일하지만 배경 컨텐츠나 디자인, 혹은 스킬 정도를 다양하게 변형한 것들이죠. 이런 꾸밈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게임이 다른 매체처럼 폭넓게 발전하려면 소위 '혁신적'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요소를 계속 발굴하고 개발해 나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제가 비록 직접적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속한 회사가 그리 떳떳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20년이 넘은 역사를 가졌지만 여전히 초창기 게임 디자인적 요소에서 혁신이라고 부를 만한 발전은 없었던 것 같네요...


게임의 예술성과 게임 디자이너가 따라야 하는 윤리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저자는 게임이 영화나 음악과 같은 다른 매체가 그렇듯이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선 어떤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게임이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매커니즘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구체적인 생각이나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다만 다른 매체에 비해 게임의 역사가 극히 짧은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다른 예술 분야 역시 초기에는 예술보다는 잡기로 폄하되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게임 역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예술 분야로써 인정받는 시대가 충분히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저자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정리하자면, 전반적으로 게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이미 초판이 나온지 10년이 넘은 책이기 때문에 이미 다른 곳에서 많이 언급되었거나 논의된 내용도 많아 지금 시점에서 보면 식상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이 책은 '고전'으로 불리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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