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에서 방황하다
2011년 9월 29일..(2)
오후 2시 쯤, 시티에서 볼 일을 다 마쳤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유학원 사무실에서는 멜번은 비가 금방 그치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록 비가 그치질 않는다.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니 10명 중 2-3명만 우산을 쓰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닌다. 집에서 나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길을 나선다.
시티의 건물들은 대부분 길쪽으로 처마를 길게 만들어서 인도를 거의 덮도록 되어 있어서 길을 건널 때만 살짝 비를 맞고 기차역까지 뛰어갔다. 자, 이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이다.
어제도 잠깐 적었지만 시티 주변의 Zone1, 그리고 외곽의 Zone2가 있는데 기차요금이 다르다. 존1내에서만 다니면 3불(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 정도다.), 존2에서만 다니면 2불 50, 그리고 존1과 존2를 다 사용하면 5불 50. 지금은 Myki 카드라는 것이 있어서 탈 때 찍고, 내릴 때 찍으면 자동으로 충전된 금액에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존1용 종이티켓 따로, 존2용 종이티켓 따로, 존1+2용 종이티켓 따로였다. 그리고 가끔 인스펙터가 나타나서 잘못된 표를 가지고 있으면 벌금을 250불 정도 매긴다고 하는데, 해리포터 시리즈의 아즈카반의 죄수에 나오던 그 인스펙터가 연상된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존1의 마지막역, 즉 내가 내려야 할 헌팅데일역은 조그만 역이라서 익스프레스를 타면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헌팅데일역을 지나치면 내가 가진 존1티켓으로는 갈 수 없는 클레이튼역이 나오고 인스펙터에게 걸린다면 난 죽음이다.
플린더스스트릿역에서 모니터에 나오는 정차할 역 리스트를 보니 지금 출발하는 기차는 익스프레스다. 그래서 그냥 보내고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모니터를 잘 살펴보니 이번 기차는 모든 역에 정차한다. 그래서 냉큼 올라탔다. 오후 4시 정도였는데 퇴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래서 시끌벅적한 데다가 내 극악의 리스닝 수준으로는 방송으로 나오는 역이름을 알아듣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역이름을 보여주는 전광판만 노려보고 있었다.
Richmond - South Yarra - Hawksburn - Toorak - Armadale - Malvern - Caulfield - Carnegie - Murrumbeena - Hughesdale - Oakleigh - Huntingdale - Clayton-.........
내가 지나가야할 역 리스트이다.
드디오 노려보고 있던 전광판에 Oakleigh라는 역이 떴다.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된다. 오클리 역을 출발하는 기차의 전광판에 다음역 이름이 뜨는데 'Huntingdale'이 아니라 'Clayton'이 뜬다. 허걱!!! 이것이 어찌된 것이지? 분명 모든 역에 정차한다는 걸 보고 탄 것인데!! 어찌할 바를 몰라서 식은땀이 흐른다. 역에 기차가 정차한다. 얼른 내렸다. 그런데 어제 멜번에 도착하자마자 봤던 클레이튼 역이랑 분위기가 다르다. 같이 내렸던 사람들은 하나둘 역을 빠져나가고 승강장엔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5시도 안 된 시각인데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혼자 서있다.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어디인가 역이름을 찾아보니 'Murrumbeena'이다. 확인하고 나서도 어리둥절하다. 분명 Clayton이라는 전광판의 역이름을 확인했는데?? 승강장에 혼자 서있는데 10분이 넘도록 사람도 아무도 안 나타나고 기차도 안 지나간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누군가 역 안으로 들어온다. 인도 아가씨다. 내 상황을 한참을 안 되는 영어로 설명했더니 쿨하게 전광판이 가끔 고장난단다. '헐....' 그리고는 역에 설치되어 있는 열차안내시스템-초록색 버튼을 누르면 다음 기차가 언제 도착하는지, 익스프레스인지 아닌지를 알려준다.-을 들어보더니 이번에 들어오는 열차도 모든 역에 정차하니 타면 된다고 한다. 고맙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결국 다시 기차를 타고 헌팅데일 역에 내렸다. 집까지 15분을 걸어가야 한다. 비는 계속 오고 있다. 집에서 나오기 전 외워뒀던 집까지 가는 길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기억을 더듬어 한 10여 분을 걸었는데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2-3분 걸어들어가니 이 골목이 아니다. 다시 나와서 다음 골목으로 또 들어가 본다. 이 골목도 아니다. 다음 골목, 다음 골목.... 결국 6번째 골목이 집으로 가는 골목이다. 그렇게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6시가 넘었다.
그렇게 멜번에서의 두번째 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