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미국 잡지 '타임(TIME)'과 '뉴요커(The New Yorker)'를 선망했다. 영어 공부하려고 도서관에서 들춰본 타임, 뉴요커는 기자 되기를 희망하던 내게 신문이나 방송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긴 호흡으로 대상/현상을 다루고, 거기에 적합한 사진과 이미지를 결합해 보기 좋게 편집하고, '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싶은 기획물을 매주 턱턱 내놓는 것을 보면서 '나도 이런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시사잡지에서 일하면서 현실에 부대낄 때마다 종종 남편에게 "나는 한국의 타임, 뉴요커를 만들려고 했지"라고 푸념하곤 했다. 그러면 남편은 "아니 그러면 타임이나 뉴요커에 들어가지 그랬어" 하고 농담을 던졌다. 한국어는 잘 하는데 영어는 못 하는 걸 어쩌라고. -_-;;
뉴욕은 2007년 출장으로 처음 와봤다. 뉴욕에 온 기자들은 뉴욕타임스 사옥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곤 하는데, 나는 여기에 더해 '콘데 나스트(Conde NAst)' 사옥을 찾아갔다. 콘데 나스트는 뉴요커를 비롯해 보그, GQ 등 다양한 잡지를 발행하는 미디어 그룹이다. 타임스퀘어 인근 콘데 나스트 사옥 앞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저랑 여기 간판 나오게 사진 좀 찍어주세요' 부탁했다. 내 카메라를 받아쥔 백인 아저씨는 아니 뭐 이런 데서 사진 찍나, 하는 표정이었다. (뉴요커 사무실은 2015년 원 월드 빌딩으로 이전했다. 원 월드는 9.11 테러로 희생된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세워진 새 빌딩이다.)
물론 뉴요커도 한 부 사서 몇 년간 책장에 고이 꽃아두고 가끔 뉴욕 생각 날 때 들춰봤다. 마침 표지가 뉴욕 관광객을 그린 그림이라 뉴욕을 처음 가본 내게 잘 어울리는 기념품이었다.
2017년 6월 11일 발행된 뉴요커 표지
공간은 '각자', 음식은 '함께'
[pixabay]
뉴욕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된 9월 초순, 21년 역사의 '뉴요커 페스티벌'이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전면 온라인 행사로 전환돼 열린다는 뉴스가 나왔다(참고). 기간은 10월 5일부터 13일까지. 뉴요커는 매년 가을 정치, 경제, 학계, 대중문화 등에서 이슈가 있는 인물을 초대해 뉴요커 기자와 대화하는 토크 쇼(Talk Show)를 연다. 뉴요커 홈페이지에 지난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연사의 열정적 스피치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등 분위기가 꽤 좋아 보였다. 과연 웨비나(Web Seminar)가 이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워낙에 웨비나가 일상이 돼서 여기까지는 별로 신기할 게 없는 뉴스다. 그런데 역시 '기획의' 뉴요커다. 여기에 더해 뉴요커 페스티벌은 식사를 제공한다. 각자 집에서 뉴요커가 보내준 같은 식사를 하면서(단, 배달 범위는 뉴욕시만) 온라인으로 토크 쇼를 보는 거다. 음, 재밌겠는 걸!
2019년 스무 번째 페스티벌에는 당시 트럼프 탄핵을 주도하던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 심층 추적 보도로 백만장자 제프리 앱스타인을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구속시킨 줄리 브라운 기자 등이 출연했다. 올해 페스티벌 라인업 역시 화려하다. '미국의 정은경',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 화제의 미 정치 신예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줄여서 AOC), 팝스타 피오나 애플 등등.
어떤 토크를 들을까 고민하다 코로나 시대이고, 한국에서 코로나19 이슈 때문에 파우치 발언을 체크해왔던 터라 왠지 친숙한 파우치 박사의 토크와 1인분의 식사 티켓을 구매했다. 토크는 개당 19.95달러, 식사는 42달러다. 13개 토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VIP 패스는 42달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온라인 토크쇼라면 티켓 한 장당 한 명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싶었다(이게 웨비나 주최 측이 감수해야 할 약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보지 말자 싶어 근처 사는 친구 부부를 우리집에서 열리는 뉴요커 페스티벌에 초대했다.
행사 앞두고 파업한 인간적인(?) '뉴요커'
두 여성 정치인의 뉴요커 페스티벌 출연 취소를 알리는 NYT 기사
스케줄이 다시 잡힌 걸 봐선 노사간 합의가 이뤄진 듯
하지만 뉴요커 역시 인간의 조직이라 문제가 없지 않았다. 페스티벌 개막 나흘 전에 이번 페스티벌의 핵심 연사로 꼽히는 AOC와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이 출연을 취소한 것이다. 뉴요커 노조가 페스티벌 개막일인 10월 5일 '디지털 파업'을 결의했는데, 이 두 여성 정치인은 노조의 뜻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출연을 취소했다고. 헐. 이러다 페스티벌 안 열리는 거 아냐? 큰 행사 앞뒀으니 경영진이 노조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어? 하는 말을 남편, 친구와 주고 받았다.
걱정은 주말을 보내며 깊어졌다. 분명 행사 시작 사흘 전까지 온라인 접속 및 식사 배달 관련 안내 메일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파우치 토크가 월요일인 5일 저녁 6시라서 주말에 수시로 메일함을 열어봤지만(물론 스팸함도) 메일은 오지 않았다. 이게 파업 때문이냐, 주말이라서 일 안 하는 거냐...하며 뉴요커에 대한 오랜 선망에 조금 금이 갔다.
월요일 아침,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메일을 보냈다. 티켓 결제하고 받은 컨펌 메일에 문의 연락처가 포함돼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모든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직장인은 '상사가 지켜볼 때' 일을 가장 잘/빨리 하는 법이다. 그 중 누군가는 분명 다른 누군가의 상사일테니까, 얼른 응답하겠지.
우선 파우치 토크에 대한 온라인 접속 방법안내 메일은 5분도 안 돼 들어왔다. 식사 관련해서도 "오늘 오후에 받을 수 있을 거야!"란 답장이 한 시간 후 도착했다. 본래 메뉴를 고를 수 있게 사전 연락해준다더니, 내가 이미 'shellfish/meat' 옵션을 골랐단다. 헐. 그래도 못 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그냥 받아주기로 했다.
오후 4시 무렵, 집으로 음식이 배달됐다. 1인분만 주문했는데 쿠팡 신선식품 새벽배송 보냉가방만한 게 와서 우와! 많이 보내줬나! 잠시 신났으나 열어보고 실망했다. 음식은 애피타이저와 메인, 디저트 3개이고, 그보다 부피가 큰 무지막지한 아이스팩이 들어 있었다.
친구 부부까지 초대해 뉴요커 배달음식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몇 가지 요리를 하기로 했다. 어쩐지 뉴요커와의 요리 대결이 된 셈. 우선 '뉴요커 페스벌과의 식사(Dining In with The New Yorker Festival)' 메뉴는 뉴요커의 음식 당당 기자가 피쳐링하고 할렘에서 활동하는 쉐프들이 요리한 것. 바나나의 일종인 플렌테인(plantain) 튀김과 씨푸드 검보, 그리고 고구마 파이. 여기에 맞서는(?) 내 요리는 챠슈 스타일 삼겹살 구이와 쉬림프 감바스, 애호박전, 시저샐러드, 토마토모짜렐라샐러드. 나는 챠슈가 일본 요리인 줄 알았는데, 싱가포르 사람인 친구 남편이 중국 요리라고 했다.
뉴요커와의 요리 대결(?). 검보와 챠슈 삼겹살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신(神)이 돼야 했던 파우치
저녁 6시. 모두가 음식 가득한 식탁에 둘러 앉았다. 우리집 TV에 뉴요커의 과학 및 공중보건 담당 기자인 마이클 스펙터와 파우치 박사가 등장했다. 그런데 사람이란, 특히 배고픈 사람이란 그 어떤 컨텐츠보다 먹는 것이 반가운 법. 본격적으로 식사하는 30분 동안은 파우치와 스펙터 사이의 대화를 경청하기보다는, 음식에 집중하면서 "검보 맛있다, 먹어봐", "플렌테인은 처음 먹어봤는데 말린 고구마 같아!", "차슈 삼겹살 맛있네? 레시피 좀 알려줘" 등등의 대화가 오갔다. 게다가 적어도 나는 빠른 속도의 영어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ㅠㅠ
아무튼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기자회견, 방송 출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을 향해 직언해온 파우치답게 이날 토크에서도 코로나 사태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선을 그었다. 그는 백신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개발되더라도 그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며, 언제 개발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백신의 효과가 어느 정도이고 누구부터 접종 받을 것인지라고 지적했다. 최소 2021년까지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조금만 버티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또 깨놨다.
마침 파우치가 토크를 하는 시각에 코로나19에 감염된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 퇴원을 하고 백악관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스펙터는 "그래도 되느냐"고 질문했다. 파우치는 "안 된다"는 말 대신 "전 세계적으로 1백만 명이, 미국에서 21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 40~45%는 증세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나이가 얼마든, 건강 상태가 어떠하든 우리는 최대한 감염을 피해야 한다"는 말로 에둘러 견해를 피력했다.
대화의 많은 부분은 파우치가 에이즈와 싸워왔던 1980~90년대 이야기에 할애됐다. 파우치는 1980년대 초 에이즈가 출현했을 때부터 이 전염병의 위험성에 주목하고 연구를 시작했고, 1984년 NIAID 소장이 된 이래 '에이즈와의 전쟁'에서 정부의 얼굴 역할을 했다. 에이즈의 공포에 떠는 게이 커뮤니티와 에이즈 활동가들은 에이즈 치료법을 빨리 내놓지 못하는 정부를 비난하며 파우치를 '무능한 바보', '살인자'에 빗댔다.
이에 대한 파우치의 대응법은 정면돌파.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커뮤니티로 찾아가 에이즈 환자들을 만나고, 연구소 앞으로 시위하러 온 사람들을 사무실로 불러들여 대화했다. 이날 토크에서 파우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If I were in their shoes, I would have done exactly the same thing)"이라고 답했다.
출처 : The New Yorker
래리 크레이머라는, 극작가이자 유명한 에이즈 활동가는 파우치를 대놓고 비난한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둘은 크레이머가 지난 5월 사망할 때까지 평생지기로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크레이머가 생전 파우치에 대해 한 말이 토크에서 인용됐다. "파우치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 신의 역할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신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욕을 먹었다." 에이즈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데 아무리 애써도 치료법이 당장 나오지 않는 상황에 정부 보건당국은 비난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을 억울해하기보다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이해해가며 '과학'에 애써온 파우치. 마냥 순하게 생긴 저 할아버지가 미국의 영웅이었구나, 싶었다.
파우치는 36년간 NIAID의 수장을 지내며 6개의 행정부를 겪었다. 1988년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한 토론회에서 누가 자신의 영웅인지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닥터 파우치입니다. 아마 다들 그를 모르실텐데, 매우 좋은 연구자이고 최고의 의사입니다. 에이즈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지요."
'고무되는 경험'이 아쉬웠던 웨비나
1시간 토크에서 뒤의 15분은 사전 접수에 따른 질의응답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스펙터가 물었다. "다시 영화관에 갈 수 있을까요?" 파우치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여기며 지금 해야 할 노력을 지속해나간다면. 파우치는 말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영화표를 사줄게요, 마이클. 그리고 당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영화관에 같이 가줄게요."
7시가 돼 파우치와 스펙터는 물러나고 이날 저녁의 뉴요커 페스티벌도 끝났다. CNN을 틀었다. 좀 전에 백악관으로 돌아와 마스크 벗고 엄지를 치켜든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코로나를 '이기려는' 정치인과 과학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미국의 두 키맨이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밤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뉴요커 페스티벌의 예전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무대에서 열띤 대화를 나누는 사회자와 출연자, 그리고 거기에 열렬하게 호응하는 관객들이 아주 훈훈한 분위기를 만든다. 2019년 페스티벌에는 당시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던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의장은 자신을 구슬리고자 전화를 걸어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이 '날린' 말을 공개하자 관람객들이 박장대소한다. "도널드, 당신은 카지노를 소유한 적이 있었죠. 당신이 알다시피 '하우스'가 언제나 이긴답니다(Donald, you used to own a casino. You know the house always win)." 카지노 측과 미 하원을 둘다 하우스('the House')라고 표현하는 데서 착안한 표현이다.
아무래도 웨비나는 이러한 현장의 들뜬 분위기가 없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이전까지 이런저런 토크쇼가 많이 열렸는데, 각 현장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잘 된 행사에는 늘 뜨거운 열기라는 게 있다. 고무되는 경험보다 정보 획득이 중요한 학술 심포지엄 같은 행사는 오히려 웨비나가 여러모로 효율적일 수 있지만, 대중 강연회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루 빨리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돼 영화관도, 토크쇼도, 각종 공연도 즐겁게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파우치 같은 과학자 말에 우리가 더 귀를 기울여야 할텐데, 트럼프 같은 사람이 적지 않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