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에서 열리는 미국 최대 사진전 ‘포토빌’
울 것 같은 눈빛에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 다짐한 입매였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진 못하고, 자신의 키와 어슷하게 자란 두 아들의 어깨를 양손으로 그러쥐고 있었다. 붙잡으려는 건 아이들일까, 자신일까. 여자의 슬픈 눈빛이 잊히지 않아 브루클린의 덤보(DUMBO)를 다시 찾았다.
며칠 전 갈 길 바빠 제대로 챙겨 읽지 못했던 이 사진의 제목은 ‘슬픔의 초상(Portrait of Grief)’.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속 사진작가 웨인 로렌스(Wayne Lawrence)가 뉴욕-뉴저지와 뉴올리언스, 디트로이트를 돌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미국인들의 사진을 찍었다.
여자의 이름은 로라 웰른. 지난 3월 남편 토니가 코로나19로 마흔 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로라 옆에는 케빈과 그의 딸이 서 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부녀(父女)는 몹시 지쳐 보인다. 케빈의 아내 티파니 역시 코로나19로 지난 4월 사망했다. 마흔 셋의 나이였다.
포토빌(Photoville) 페스티벌은 미국 최대의 무료 사진전이다. 매년 가을 브루클린브릿지 아래 공원에서 열린다. 지난해 8번째 행사에는 600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하고 10만 명이 관람하는 등 대성황이었다. 뉴욕시 중·고등학생의 견학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사진 예술과 비주얼 스토리텔링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높이는 것’이 포토빌 페스티벌의 취지. 공원에 화물용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그 안에 사진을 전시하기 때문에 로고에는 컨테이너가 그려져 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올해 행사에는 컨테이너가 설치되지 않았다. 대신 야외 판넬에 사진을 전시하고, 전시 장소를 뉴욕 전역으로 넓혔다. 브루클린 외에도 맨해튼, 퀸즈, 스탠튼 아일랜드, 브롱스에서 전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포토빌의 본거지 브루클린에 가장 많은 작품이 전시돼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 뉴욕타임스, 타임 등 기성 매체에서부터 신예 작가까지 다양한 사진 가들이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선보인다. 하지만 올해는 아무래도 코로나 팬데믹과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와 관련한 작품이 많다. 홈페이지에서도 일부 작품을 볼 수 있지만, 전체 작품을 선명하게 인쇄된 형태로 보려면 역시 현장에 가야 한다.
지난 3월 코로나19가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을 때, 뉴욕타임스는 사진작가들을 전 세계로 보냈다. 이들의 미션은 평소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명소의 현재 모습을 기록하는 것. ‘The Great Empty’란 제목으로 출품된 뉴욕타임스의 사진들에는 파리 콩코드 광장, 뉴욕 오큘러스 환승센터 등의 텅 빈 모습이 담겼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인파로 가득 찼던 공간에 사람 그림자가 싹 사라진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밤 풍경도 있는데, 본래 한밤에는 별로 사람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 아파트 사진에는 각 집마다 빼곡하게 사람이 있는 모습이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확 달라졌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코로나에 신음하는 제3세계의 모습을 선보이고(‘The Far-reaching Fallout from COVID-19), 로셈 모튼(Rosem Morton)이란 간호사 겸 사진작가는 팬데믹과 싸우는 의료진의 모습을 기록했다(‘Donning and Doffing’). 마스크가 부족해 마스크에 이름을 써서 걸어둔 모습, 손소독제로 거칠어진 손, 병원 창문에 붙은 시민들의 감사 인사 문구…. 지난 2~3월 대구 사태 때 서울에서 코로나19 관련 취재를 많이 했었다. 그때 취재차 인터뷰했던 의료진들이 기억 나 마음이 뭉클했다. 뉴욕의 주요 대중교통 중 하나인 NYC Ferry는 마스크를 쓴 채 페리에 탄 시민들 사진을 전시했다. 요즘 주로 페리를 타고 다니는 내가 자주 보는 일상이라 흥미롭게 감상했다.
여러 작품 중 가장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 것은 ‘Asian Americans on Race and the Pandemic’이었다. 브루클린 덤보 페리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이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10명의 아시안계 사람들의 사진이 뉴욕의 길거리, 지하철, 식당, 화장실 등의 배경에 걸려 있다.
코로나19가 미국을 강타하자 아시안계 사람들에게 인종혐오 발언과 행위가 쏟아졌다. 미국 시민권자든, 중국계가 아니라 한국계나 일본계이든 구별 않고 인종혐오 테러를 당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은 신문기사, SNS, 그리고 지인들의 전언으로 서울에서도 많이 접했었지.
이 작품은 코로나19로 인한 인종혐오를 겪은 10명의 아시안계 미국인의 경험을 전한다. 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생후 3개월 때 부모님과 미국으로 이민 온 하쿠라 사카구치(Haruka Sakaguchi). 사카구치는 페이스 타임(Face Time)으로 10명의 사진을 찍고, 그들이 인종차별을 겪은 장소의 사진에 인물 사진을 붙였다. 그들의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6월 25일자 타임 지(紙)에 자세하게 실렸다. 타임지의 한국계 사진기자 강상숙(Sangsuk Sylvia Kang) 씨가 함께 보도한 기사라고 해 더욱 반갑게 읽었다.
같은 아시안이어서, 여성들 사연이 적잖아서, 그리고 한국계 사람이 겪은 일도 몇몇 있어서 한 명씩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특히 질린 리아오(Jilleen Liao)가 인종혐오를 겪고 취한 대처가 너무 공감됐다. 5세대 중국계 미국인인 35살의 그녀는 식료품을 한가득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스크를 고쳐 쓰려고 잠시 멈췄다. 그때 양키 모자를 쓴 한 노인이 길을 건너 그녀에게 다가와서 “다음엔 너네 나라에서 질병을 가져오지 말라”고 말했다. 주름을 볼 수 있었을 정도로 노인은 자기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이후 리아오는 마트에 자주 가야 하더라도 식료품을 조금씩 사온다. 노인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4개의 식료품 봉지를 들고 었다. 그렇게 짐이 많으면 만약의 사태에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니까 차라리 마트를 자주 가기로 한 것이다. 또 그녀는 스케이트 보드를 타기 시작했다. 다른 보행자와의 거리를 좀더 두기 위해서다.
23살의 2세 한국계 미국인인 황한나는 자신의 직장인 은행에서 황망한 일을 겪었다. 한 고객이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중국인이다. 다른 직원을 불러달라”고 한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은행 창구와 고객 사이에 유리창이 놓여 있었다. 황씨는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제주 누들 바’를 운영하고 있는 더글러스 김(41)은 지난 4월 누군가 자신의 가게 유리창에 써놓고 간 “개를 먹지 말라”고 쓴 낙서를 지워야 했다. 그의 식당은 실내 영업뿐만 아니라 배달이나 픽업 영업도 중단한 상태였는데, 비단 코로나19 사태 때문은 아니었다. 직원들의 안전 때문이었다. 더글러스 김은 “직원들은 대중교통을 타는 것을 우려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낯선 이들에게서 끔찍한 표정을 볼 지도 몰라서였다"고 말했다.
10명의 아시안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흑인인권운동의 편 서기 위함이다. 흑인에 대한 오랜 인종차별과 자신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결국 뿌리가 같다는 것을, 누구나 인종혐오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무명(無名)에 묻히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멋졌다. 그리고 인물과 장소의 사진을 결합한 기획 역시 매우 멋졌다. 이런 보도물을 간행한 타임 지도 멋있다.
포토빌 전시는 11월 29일까지 계속된다. 브루클린에 간다면 잠깐 시간 내 작품을 하나씩 감상해보길 권한다. 코로나 시대니까 홈페이지에서 사진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코로나 시대의 사진 기록에 대해 좀더 관심이 생겼다면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1에서 관련 사진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기자 시절 즐겁고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는 기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보도 사진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사진기자와 함께 현장 취재를 한 뒤 나중에 기사와 사진을 합쳐놓고 보니 제 짝을 만난 완벽한 보도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 피곤함이 날아갈 정도로 보람을 느꼈다. 독자도 같은 소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년의 포토빌 페스티벌에는 코로나19가 종식된 뒤 일상을 되찾은 지구촌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수출항은 불야성일 정도로 바쁘고, 거리의 식당과 펍은 북적거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어쩌면 유토피아는 멀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