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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nam Kang Sep 26. 2020

백화점 대신 트럭을 탄 구두

지미 추를 박차고 나온 '센 언니'가 허드슨 야드에 떴다

요즘 뉴욕의 핫플레이스, 베셀(Vessel)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베셀 계단을 한참 오르내리며 땀 흘린 아이들을 위해 아이스크림 파는 데가 있나 주변을 둘러봤다. 우윳빛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소프트 아이스크림 파나 봐! 하며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이 있어야 할 트럭에 구두가 한 가득이었다. 전면이 통유리로 돼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트럭 내부에는 선반이 촘촘하게 짜여 있고, 그 위에 샌들, 펌프스, 앵클부츠에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부츠(Knee High Boots)까지 구두가 그득하게 진열돼 있었다. 패리스 힐튼의 옷장을 광장으로 끌어낸 건가! 구경하러 바짝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들어와서 구경해보세요.”


“이게 뭔가요?”


“타마라 멜론(Tamara Mellon)의 모바일 스토어에요. 들어와서 마음에 드는 구두를 신어보세요!”    

 

타마라 멜론. 언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고 기억이 났다. 여자들의 로망 구두, 지미 추(Jimmy Choo)의 공동 창립자다.  

    

“코로나 때문에 구두를 가지고 밖으로 나온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 브랜드는 주로 온라인으로 판매해요. 숍은 두 군데 있고요.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을 잘 안 하잖아요. 온라인 쇼핑이 아무리 편리해도 가끔은 직접 만져보고 신어보고 싶고요. 그래서 트럭을 스토어로 만들었어요. 뉴욕 투어가 끝나면 마이애미로 갈 거예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요?”


“네!”






지미 추보다 '지미 추'에 오래 헌신한 공동창업자

  


20대 시절, 영어 공부를 HBO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로 했다. 사실 영어 공부는 핑계고, 드라마가 너무 재밌었다. 캐리 브래드쇼 4인방에게서 우정, 연애, 나아가 인생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 더, 아름다운 구두의 세계에 대해서도 배웠다. 지미 추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보다 덜하더라도 ‘캐리 언니’가 사랑한 구두 브랜드였다. 미스터 빅과의 이별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외로워하던 시절(시즌3)의 캐리 언니는 말한다.    

 

“With no man in sight, I decided to rescue my ankles from a life of boredom. By purchasing too many pairs of Jimmy Choo shoes.”
(“남자 없는 지루한 인생에서 내 발목을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엄청 많은 지미 추 구두를 사들임으로써.”)    
 


지미 추의 마력에 대해서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에밀리도 인정했다.

   

“You sold your soul to the devil when you put on your first pair of Jimmy Choos.” (“지미 추를 신는 순간 영혼을 악마에게 팔게 된다고.”)      


지미 추 브랜드는 1996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지미 추는 영국 런던에서 수제 구두를 만들던 구두 장인이었고, 타마라 멜론은 패션지 ‘보그’의 액세서리 담당 에디터였다. 하이힐도 편안하게 신을 수 있게 만드는 지미 추의 실력에 감탄한 멜론은 아버지에게 15만 파운드(약 2억3000만 원)를 빌려 지미 추와 공동으로 지미 추 브랜드를 세웠다. 당시 멜론은 27세였다.


지미 추 구두를 알리기 위해 멜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로 향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둔 톱스타들에게 의상에 맞는 구두를 맞춤 제작해주겠다고 설득하고 다닌 그녀의 열성 덕분에 지미 추는 빠르게 ‘레드카펫 구두’의 대명사가 됐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 언니가 지미 추 쇼핑백을 들고 뉴욕 거리를 활보한 효과 또한 대단했다. 지미 추는 곧 세계적 구두 브랜드의 반열에 올랐다.


사업은 승승장구했으나 지미 추와 멜론의 관계는 나빠졌다고 한다. 2001년 ‘디자이너’ 지미 추가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고 떠났고, ‘브랜드’ 지미 추는 사모펀드 등으로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멜론은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hief Creative Officer)로서 계속 지미 추에 헌신했다.    


 



여자 상사까, 남자 부하직원과 똑같은 월급을 받으라고?

타마라 멜론 [www.tamaramellon.com]


하지만 2011년 멜론은 지미 추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 흔한 것이어서 다소 황당하다. 멜론처럼 비즈니스를 세계적 수준으로 성공시킨 이도 여성이라서 젠더 이슈에 발이 걸리다니.     


타마라 멜론은 급여 문제 때문에 2011년 지미 추를 떠났다고 밝혔다. “내 남자 부하 직원들과 똑같은 급여를 받을 수 없었어요.” 멜론은 전적으로 남성이 사모펀드 이사회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내가 이 회사를 세웠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하더라도 남성의 일이 더 가치 있다는 편견이 존재했습니다. 결정할 때가 된 거죠. 나는 충분히 화가 났고, 그래서 지미 추를 떠나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진 새로운 회사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을 반영한 가치를요.”  (출처 : LA타임스)  

   

2년 후 멜론은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자신의 구두 브랜드 ‘타마라 멜론’을 창립한다. 16년간 성공적으로 지미 추를 이끌어왔지만,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니 패션 비즈니스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자라, H&M 등 의류 산업은 이미 ‘패스트 패션’이 대세인데 럭셔리 구두 산업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겨울에 여름 시즌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멜론은 ‘Buy now, Wear now’를 슬로건으로 삼았다. 기획에서 제품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을 한 달로 줄여 구두에도 패스트 패션을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이 내 머리에서 외계인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날 쳐다봤죠.” ‘Buy now, Wear now’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대해 멜론이 한 말이다. (출처 : 뉴욕타임스)


패션업계는 멜론의 새로운 실험을 마뜩찮아 했다. 타마라 멜론은 버도프 굿맨, 삭스 피프스 애비뉴, 니만 마커스 등 뉴욕의 고급 백화점에 입점하지만, 쓴 실패를 맛봤다. 결국 2015년에 파산 신청을 했다.      




"구두를 디자인하고, 규칙을 깨겠습니다"     



www.tamaramellon.com



타마라 멜론(왼쪽)과 지미 추의 앵클 부츠 가격 비교


멜론이 여기서 멈췄더라면 ‘구두 모바일 스토어’라는 재미난 트럭이 달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을 터. 멜론은 절치부심하며 지미 추를 성공시켰던 LA로 옮겨간다. 그리고 백화점 같은 도매업계에 의존하지 않고 고객을 직접 만나기로 사업 전략을 바꿨다. 2017년부터 자체 홈페이지에서의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는 버전2.0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타마라 멜론의 구두 트럭에서 눈에 들어오는 샌들, 부츠를 들어 밑바닥을 확인했다가 가격이 500~600달러나 되는 것을 보고 살포시 내려놨다. 하지만 지미 추에 비하면 타마라 멜론은 저렴한 편이다. 오프라인 유통에 드는 비용을 줄였기 때문이다. 두 브랜드의 홈페이지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앵클부츠 가격을 비교해보니 지미 추는 950달러, 타마라 멜론은 650달러로 꽤 차이가 났다.


이번에는 통했다. 2018년 타마라 멜론은 전년 대비 136% 성장했다. 여세를 몰아 지난해 5000만 달러(약 590억 원)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 총 자본금을 8700만 달러로 늘렸다. 타마라 멜론은 이 투자금을 인력 확충 및 제조 혁신에 쓸 계획이다. 현재 LA와 뉴욕 소호 두 곳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도 5개 정도 더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I co-founded Jimmy Choo in 1996. Today, I'm still obsessed with shoes, but not the traditional way of doing things. So I’m starting over. This is my reboot (pun intended). I'm redefining luxury and doing what I do best: designing shoes and breaking rules.”
(“저는 1996년 지미 추를 공동 설립했습니다. 전 여전히 구두에 매료돼 있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럭셔리를 재정의하며 재가 잘 하는 것을 하겠습니다. 구두를 디자인하는 것, 그리고 규칙을 깨는 일을요.”)   


멜론이 홈페이지에 밝혀놓은 출사표다. 이 회사는 멜론 이하 주요 멤버가 여성으로 구성돼 있고, ‘동일 임금의 날(Equal Pay Day)’ 운동을 지지한다(이는 성별 임금격차를 계산해 여성이 남성과 같은 연봉을 받으려면 며칠을 더 일해야 하는지 보여주며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역설하는 국제적 사회 운동이다). 또 타마라 멜론은 패션산업의 도소매 방정식을 따르는 대신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며 가격 거품을 뺐다. 다만 ‘소비자 체험’을 위해 최소한의 오프라인 숍을 운영한다. 그리고 전염병 팬데믹을 맞아 새롭고 재미난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구두 트럭을 마련했다!     


타마라 멜론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구두 트럭은 애초에 코로나 때문에 고안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겨울 시즌 구두 트럭은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닌 전력이 있다. 타마라는 “여성과 여성의 니즈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라고 구두 트럭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맞아 구두 트럭은 제대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타마라 멜론의 구두 트럭이 찾은 미 동부의 첫 장소는 지난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햄튼.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부자들의 여름 휴양지이자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다는 지역이다. 8월 햄튼 투어를 마친 트럭은 이 달 요즘 맨해튼에서 핫스팟으로 불리는 허드슨 야드(Hudson Yard)로 옮겨왔다. 10월에는 플로리다 마이애미로 간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트럭에는 한 번에 2명까지만 오를 수 있고,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일회용 장갑도 제공 받을 수 있고, 사전 방문 예약도 가능하다.     





코로나 시대의 마케팅은 야외에서


“진짜 트럭에서 구두 사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서는 신어보는 거고 주문은 온라인으로 해야 해요. 고객들이 트럭에서 신발 신어보는 걸 재밌어하고, 저희 브랜드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어요. 전 구두 트럭이 요즘 같은 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트럭을 지키는 다정한 직원은 럭셔리 구두를 살 생각이 전혀 없는 손님에게도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뉴저지에 물류창고가 있어서 사나흘 내에 배송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고.


한때 셀럽 마케팅과 고급 백화점 진출로 일가(一家)를 이뤘으나, 지금은 옛 성공의 룰에서 탈피한 멜론의 전략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니먼 마커스 등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들이 줄줄이 파산 신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셀은 아파트, 호텔, 쇼핑몰 등을 한데 개발 중인 허드슨 야드의 대표적 볼거리다. 즉, ‘이 멋진 건축물 구경 왔다가 쇼핑하고 밥도 먹고 가세요’가 베셀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베셀과 마주보고 있는 허드슨 야드 쇼핑몰은 눈물 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티파니, 디올 등 럭셔리 브랜드는 물론이고 ‘만만한’ 자라, 유니클로, H&M에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뉴욕의 대표 햄버거 쉑색버거도 메디슨 스퀘어 공원 등에선 영업하지만 이 쇼핑몰에선 여전히 문 닫혀 있다. 오는 사람 없으니 문 열 필요가 없겠지. 


반면 베셀을 둘러싼 야외 공간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야외 펍도 있고, 대형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며 음식과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었다. 쇼핑몰 내의 디올보다 구두 트럭이 손님을 만날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지미 추의 기업 가치는 12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에 대자면 타마라 멜론은 이제 막 시작 단계의 신생 브랜드에 불과하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더욱 뚜렷해진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작고 기민한 타마라 멜론이 더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구두 트럭이 뉴욕에서 마이애미까지 무려 2000km를 달려가듯 타마라 멜론도 롱런할 것인지 흥미롭게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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