쉑색버거 본점이 있는 메디슨 스퀘어와 파머스 마켓으로 유명한 유니온 스퀘어는 도보 10분 거리로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 이 두 곳 사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더 있다. 공원의 이름은 그래머시 파크(Gramercy Park). 메디슨 스퀘어 남쪽에서 유니온 스퀘어 방향으로 두 블록 내려가 왼쪽으로 꺾어 또 두 블록만 가면 나온다.
뉴욕이 매력적인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도시 곳곳에 공원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센트럴파크 외에도 크고 작은 공원이 높은 빌딩과 많은 인파에 지쳤을 즈음마다 나타나 숨통을 트여준다. 하지만 그래머시 파크는 예외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인근 주민만 출입할 수 있는, 프라이빗 공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제공한 383개 열쇠의 주인만이 2에이커 크기의 이 작은 공원에 입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머시 파크 주변은 산책가볼 만한 동네다. 비록 공원에 들어가진 못해도 공원 주변이 '여기가 맨해튼 맞나' 싶게 조용하고 운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압도하는 크고 높은 빌딩은 없고, 높아야 10층 안팎의 낮은(?) 건물이 주를 이룬다. 4층짜리 아담한 주택도 꽤 많다.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붉은 벽돌과 그 벽돌을 덮은 덩굴식물이 다정하다. 집들의 문, 창틀, 베란다, 전등, 그리고 거리의 가로등까지도 어쩐지 유럽 도시 느낌이다. 심지어 어느 아파트 입구 양쪽엔 창을 든 갑옷 입은 기사 동상이 하나씩 서 있어 유럽 귀족의 저택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종종 근래에 지은 듯한 현대식 건물이 섞여 있지만, 동네의 전체적 분위기를 해칠 만큼은 아니다.
그래머시 파크를 철장 너머로 감상할 수는 있다. 사실 평범한 공원이다. 여느 뉴욕의 공원처럼 아름드리 나무가 많고, 다람쥐가 재빠르게 뛰어다닌다. 다만 알렉산더 칼더의 조각 작품을 설치했다는 점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 칼더의 손자, 알렉산더 로어가 이 동네 주민이라서 그 인연으로 칼더 재단이 공원에 'Janey Waney'란 작품을 영구 임대해줬다고 한다.
워싱턴 어빙이 살던 동네
그래머시 파크 일대는 1830년대 일종의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졌다. 사무엘 러그스(Samuel B. Ruggles)라는 뉴욕의 정치인이 이 일대 땅을 보유했고, 그 중 일부를 시에 헌납해 그래머시 파크가 조성됐다고 한다. 헌납의 조건은 인근 주민에게만 개방할 것. 이 약속이 200년 가까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우선 그래머시 파크가 조성된 뒤 주택이 속속 건설됐다. 주로 그리스 및 이탈리안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러그스는 그래머시 파크 남쪽 거리를 '어빙 플레이스(Irving Place)'라고 이름 지었다. 미국이 낳은 최초의 세계적 작가로 칭송 받는 작가 워싱턴 어빙(1783~1859)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빙이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빙이 살았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어쨌거나 어빙 플레이스 17번가 주택(122 E 17th St)에는 어빙의 현판이 붙어 있고, 그 건너에는 '워싱턴 어빙 고등학교'도 있다. 어빙의 대표작이자 팀 버튼 감독이 영화로 제작한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에 등장하는 '머리 없는 마부(Headless Horseman)' 이름을 딴 술집도 있다.
또 이 거리에는 피츠 타번(Pete's Tarven)이라는, 1864년에 처음 문 연 식당이 지금도 있다(코로나 사태로 현재는 일시 영업중단 상태다). 간판에 '링컨이 대통령일 때부터 영업했다'고 자랑스럽게 써놓았다. 이 식당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가 즐겨 찾던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루드비히 배멀민즈도 여기서 '마들린느(Madeline)' 시리즈를 구상했다고도 한다. 시공사 네버랜드 세계의 걸작 그림책에 포함된 '씩씩한 마들린느', '마들린드의 크리스마스'를 아이들과 수도 없이 읽은 터라 매우 반가웠다.
어빙이 살았다는 집 2층 베란다 난간에 돌로 만든 엘프가 누워 자고 있다. 이 깜찍한 장식물은 이 자리를 지킨 지 몇 년 됐을까, 하며 구경하는데, 베란다 창문 안쪽으로 소파에 앉아 전화통화를 하는 남자가 언뜻 보였다. 역사적 스토리가 녹아 있는 집에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4달러 커피로 동네 사람 되는 기분
그래머시 파크는 못 들어가도, '어빙 팜 뉴욕'이라는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마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그래머시 파크 남쪽, 피츠 타번 건너 편에 '프렌즈 오브 파머(Friends of Farmer)'라는 유명한 식당과 '베드포드 치즈 숍(Bedford Cheese Shop)'이라는 예쁜 치즈가게 사이에 어빙 팜 카페가 있다. 이 카페는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아파트의 조금 반지하 같은 가든 플로어에 흰색 페인트를 정성껏 칠하고 출입문 앞에 테이블과 의자 몇 개를 가져다놓았다. 커피가 맛이 없을 리 없는 분위기다.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실내 영업은 중단된 상태라 아메리카노와 드립 커피를 사들고 야외 좌석에 앉았다. 커피는 신맛이 약한, 중후하면서 안정된 느낌이었다. 드립 커피보다 아메리카노가 더 그윽하다는 점에서 나와 일행은 동의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쌀쌀한 가을날임에도 어빙 팜을 찾는 동네 손님들은 적지 않았다. 커피를 사들고 가는 손님들이 계속 찾아왔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커피 호호 불어가며 대화하는 손님도 끊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속에 섞여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자니, 나만 이방인이라는 어색함은 금세 잊었다. 잠시나마 분주한 맨해튼에서 벗어나 오래된 동네의 주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 카페는 1996년부터 이 거리, 어빙 플레이스를 지켰다. 피츠 타번에 비한다면 일천한 역사이지만, 커피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 25년을 버텼으니 훌륭한 성적이라 하겠다.
대학 친구인 데이비드(David Elwell)와 스티브(Steve Leven)가 1990년대 중반, 뉴욕에서의 스타벅스의 무서운 확장세를 지켜보며 '우리도 해보자'며 어빙 플레이스에 첫 카페를 냈다. 2000년 들어서는 커피 로스팅에도 뛰어들었다.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밀레턴(Millerton)의 농장을 사들여 커피 로스터리를 만들었다. 현재 이곳 어빙 플레이스의 매장을 포함해 맨해튼에서 7개 매장을 운영할 정도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지금도 어빙 플레이스에서 커피숍 스스로가 로스팅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카페라고 한다.
그래머시 파크의 열쇠와 자물쇠는 매년 교체된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벌금 1000달러를 내야 재발급 받을 수 있고, 한번 더 잃어버리면 벌금은 두 배가 된다고 한다. 주민이 아니더라도 공원에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그래머시 파크 호텔'의 투숙객이 되면 된다. 체크인을 하면 손님에게 공원 열쇠를 제공했었는데, 하도 손님들이 기념품 삼아 열쇠를 훔쳐가서(?) 호텔 직원이 손님을 공원으로 데려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호텔의 하루 숙박비가 가장 작은 방도 80만 원이나 한다는 데 있다. 요즘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업을 중단한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뉴욕 여행을 하는 어느 날, 번잡스러운 뉴욕 특유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동네에서 조용하게 커피 한 잔 하고 싶다면, 어빙 플레이스를 찾아와 어빙 팜 커피를 마셔보는 것을 추천한다. 날씨가 좋다면 4~5달러짜리 커피 한 잔 들고 그래머시 파크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굳게 닫힌 공원의 문에 마음이 조금 상하지만, 그래도 창살 사이로 공원 내부를 볼 수는 있으니까. 칼더의 조각 작품도 꽤 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