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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Aug 31. 2023

몽골 여행

패키지 4박 5일 여름 여행

‘몽탄’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나는 이번에 몽골을 여행했는데 거기서 몽탄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그럴듯 하다는 생각을 했다. 몽탄은 우리 나라 동탄 신도시를 빗댄 말인데, 몽골의 수도 울란바르토의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의 위성도시 한 곳처럼 보인다고 해서 불여진 이름이다.  거리를 오가는 몽골민들의 생김새부터가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데다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와 우리나라 브랜드의 대형마트, 편의점, 커피 전문점이 빼곡이 들어선 모습들이 정말 우리나라 개발되고 있는 신도시 한 곳 같았다. 

 

몽골의 동쪽 울란바트로시와 테를지국립공원 여행

하지만 이것은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트로만 볼 때의 얘기다. 몽골은 대한민국보다 15배의 큰 나라지만 인구는 350만에 불과한 나라다. 350만 인구의 절반 가까이 울란바토르에 모여 사니 나머지 지역에서는 사람 만나기 힘들 정도로 큰 나라다. 울란바트로는 전체 인구가 70만일 때 50만 규모의 도시로 설계하였다는데, 현재 160만이 모여 살다보니 도시가 제기능을 못하는 듯 했다. 정체, 매연, 소음과 무질서와 같은 단어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다.    

 

4박 5일이지만 오는 날 하루를 빼면 4일 동안 몽골에 있었는데 처음 이틀은 광활한 초원에서 나중 이틀은 도심 한 복판에서 보냈기에 이틀은 힐링 시간, 나머지 이틀은 서울 복귀하기 전 적응 시간이었던 것 같다.     

먼저 몽고가 아니라 몽골인 이유부터 알게 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몽고라고 배웠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몽골이라 하기에 외국어 발음상 문제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몽고는 북방민족으로부터 시달려온 중국이 몽골 사람을 비하할 때 사용한 말로 우매할 몽(蒙)에 옛 고(古)를 사용하여 ‘어리석다’라는 뜻의 말인 반면, 몽골은 ‘용감하다’란 의미라 하니 몽고와 몽골은 천양지차의 표현인 셈이다. 마치 일본이 한국인을 조센진으로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몽골하면 칭기스칸이 생각날텐데 이 나라 어딜 가도 칭기스칸을 만날 수 있었고, 이들 후예들의 영혼 속에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뤘던 그때의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극도의 물질 자본주의의 속에서 살아오면서 부의 크기로 사람을 보는 우리들이 보기에 후진국 국민들이 보이는 위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당당함이 느껴졌다는 의미다.  

        

몽골은 우리 나라와 같은 분단국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몽골은 외몽골이고 지금은 중국령인 내몽골이 있다. 몽골의 주변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에 의해 나눠졌다. 인종 구성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외몽골은 몽골족이 80% 이상 되고 내몽골은 중국 한족이 80%가 넘는다. 그런 바탕 속에 러시아와 중국의 이해 관계가 개입되니 자연스레 분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내몽골은 중국내 자치구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비자를 받아야 방문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몽골(흉노족이나 몽골족 등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을 보더라도 과거 몽골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중국과는 서로 침략하고 침략 당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몽골 최대의 적은 중국(청나라)이었고 그래서 몽골인들은 중국을 싫어한다. 반면에 러시아와는 가깝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과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국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도 가깝다. 1921년 독립이 된 몽골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70년 간 사회주의 국가로 있다가 1991년 민주주의 국가가 된다. 민주주의 국가가 된 후 가장 먼저 수교한 국가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 후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를 통해 대한민국의 한 도시를 옮겨 뒀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친숙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칭기스칸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절차를 밟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입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한국말이 들려 오기도 하고 입국 심사를 하는 분들도 왠지 우리를 다정스레 맞는 듯 했다. 별도의 입국서류를 작성하는 절차도 없는 점도 그런 인상을 더했다.  

    

공항에서 우리는 맞은 가이드는 20대 초반 잘 생긴 몽골 청년이었다. 한국에 거주한 적이 있어 우리말 하는데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몽골, 한국, 유럽에서 공부하는 동안 어느 곳의 말도 제대로 못하고 내용도 모른다며 부끄러워했다. 실제 몽골에 대한 여러 질문에 답을 못하고 가이드에도 미숙하여 일행들이 많이 당황한 여행이었다.     


공항을 빠져 나가니 확 트인 초원과 맑은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 온다. 가슴이 뻥 뚫린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스칸의 영혼이 숨쉬는 공간으로 온 것이다. 일행들을 태운 버스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큰 마트였다. 초원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부터 챙기기 위해서라 한다. 자연 화장실에 필요한 휴지부터 여행 중에 필요한 물, 비누와 같은 기본적인 것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여행 환경이 얼마나 얼마나 열악하길래 이럴까 생각하며 우리도 주섬 주섬 물건을 챙겼다. 돌이켜 보면 실제 필요한 물건은 갑작스런 상황을 대비한 휴지와 물 정도지 나머지는 게르 숙박도 호텔처럼 되어 있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몽골초원, 인터넷 이미지

초원을 달리는 동안 곳곳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가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소와 말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나라의 5축은 말, 소, 염소, 양, 낙타라고 한다. 2022년 통계로 보면 인구가 350만인데 가축이 7천만 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1인 당 20마리 가축을 기르고 있는 셈이고 이를 가족으로 환산하면 5인 가족 기준 평균 100마리를 기르는 셈이다. 이중 양과 염소가 각 2500만 마리로 가장 많다. 반면, 닭은 큰 양계장이 한 곳 밖에 없을 정도로 귀하고 돼지고기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싸다고 한다(여행 초반에 식재료가 대부분 돼지와 닭으로 만든 음식이라 진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차창밖 공동묘지 모습

공항에서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산에 하얀 비석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이 보여 물어 보니 공동묘지라고 했다. 이곳은 땅이 넓어서인지 매장이 대부분이고 아직 티벳불교의 영향을 받아 소수민족 중에는 풍장을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풍장은 건조지대에서 시체를 자연에 방치하여 새와 같은 동물의 먹도록 내버려 두는 장례문화를 말한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지대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둥근 모양의 게르는 가끔 마주하지만 주택이 모여있는 곳은 만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도로 주변에 무엇을 사거나 쉴 수 있는 마트가 있는 휴게실 같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트에 들러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게 한 듯 하다. 한번은 가게들이 열지어 있는 곳을 지났는데 그 곳이 한국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나혼자 산다’에 나온 튀김만두 가게가 있는 곳이라 했다.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튀김만두를 먹게 해주겠다고 해서 이곳에 가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울란바트로 식당에서 한 끼 식사로 먹게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튀김만두 정도의 음식은 도로가에서 먹어야 제맛이지, 정원까지 갖춘 도심의 근사한 경양식집에의 저녁 메뉴로는 좀 그랬다.    

 

오워

첫 관광지로 도착한 곳은 ‘오워’였다. 오워는 광활한 초원에서 발견되는 돌무지인데 초원에서 사는 사람들이 오가면서 돌을 쌓고 각종 생활 물건들도 던져 놓아 사막에서 오아시스처럼 하나의 표식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성황당 같은 의미도 갖는다고 했는데, 사람 발견하기 힘든 이곳 사람들 간의 위치 표시 기능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돌무지 가운데에는 형형색색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곳을 세 번 돌면서 돌을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 해서 돌을 던지려 찾아 보니 던질만한 돌이 거의 없다. 관광지로 조성된 오워이기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마다 던질 돌을 찾으니 작은 돌도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돌 부스러기를 찾아 던지며 행운을 빌었다. 오워 주변에는 활쏘기 체험하는 곳과 독수리, 매를 손 위에 올려놓는 체험을 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독수리는 20키로 정도 되어 무겁다고 해서 12-3키로 되는 조금 적은 야생 독수리를 손 위에 올려 놓는 체험을 했다. 독수리의 움켜쥐는 힘이 세서 가죽을 뚫고 손을 다친 적도 있다는 체험기가 있어 조금 걱정했는데 괜찮았다.    

독수리 체험

오워가 조성된 언덕 사방에는 푸른 초원이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연신 먼 풍경의 사진을 찍는 동안 차 안에서 가이드가 말한 몽골인의 높은 시력에 대한 설명이 이해가 된다. 몽골인의 시력은 다른 국가 민족들보다 높다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시력은 2.0정도로 그리 높지 않고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얘기라 한다. 그들의 시력은 4.0에 달하는데 멀리서 오는 아들을 보고 아내에게 아들이 오고 있다고 한 뒤 5시간이 지나야 도착한다는 에피소드가 재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시 이동하여 우리의 한강 같은 톨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고 나니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어서게 된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울란바트로 시에서 동쪽으로 60여키로 떨어져 있는 핸티산맥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몽골 최고의 휴양지다. 우리 나라는 국립공원이라 하면 설악산, 지리산, 북한산 등 산이 먼저 생각나는데 테를지 국립공원은 언덕 같은 둥그런 산이 여러 개 그리고 넓게 펼쳐져 있어 차로 오갈 수 있는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움푹 패인 비포장 도로를 곡예 하듯이 이동하는 동안 수많은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었다. 오기 전에 거북바위가 일정에 있어 저것이 거북바위인가? 아니면 이게 거북바위인가? 우리나라 같으면 각종 이름을 붙여 관광상품으로 해도 될 만한 신기한 바위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새벽 사원이라는 뜻을 지닌 아리야발 사원이었다.     

아리야발사원 입구

아리야발 사원으로 들어가는 동안 좌우의 초원의 각종 야생화들이 우리를 반긴다. 야생화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된다. 꽃 하나 하나를 클로즈업 하여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에 쉽게 발견할 수 있다던 에델바이스도 눈에 들어온다. 사원 입구에는 우리와 달리 사천왕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입구를 지나니 커다란 개가 팔자 편하게 엎드려 있다. 이곳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없어 팔자 편하게 살다 죽는 녀석이라고 했다.     

코끼리 모습의 아리야발 사원

아리야발 사원은 부처님이 타고 다니셨다는 코끼리를 형상화한 사원이라 했는데 사원 꼭대기를 오리는 108계단을 멀리서 보면 코끼리의 코 모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사원으로 향하는 동안 곳곳에 여러 색상의 팻말이 놓여 있었는데 불경의 좋은 글을 영어로 적어 둔 것이었다. 사원을 오르는 동안 내용을 음미하면서 속세의 번민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라는 의미일 듯 했다. 사원을 오르는 중간과 본당 주위에는 마니차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마니차를 한 바퀴 돌리면 불경 한 권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마니차는 티베트 불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도구로 티벳 영향의 불교여서인지 본당 앞에도 달라이 라마 사진이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 아리야발 사원에서 본 테르지 국립공원의 전경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눈으로만 담기 아쉬워 여러 컷을 남겼다. 사원 윗편 산에는 여러 색상의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옴 마니 반메 홈’이라고 한다. 즉, 모든 죄악이 소멸되고 모든 공덕이 생격난다는 의미다.   

 

사원을 내려 오면서 이곳 사원이 특별히 웅장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몽골에는 1921년 공산화가 되면서 러시아 군정기를 거치는데, 1937년에는 700여 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되었고, 3만명 이상의 승려가 살해되는 등 약 70여 년간의 불교 탄압으로 몽골 내 불교의 입지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원이 많지 않다고 한다. 사원을 내려 오면서 이곳 신랑 신부와 들러리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원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와 같은 관광객이 대부분일 정도로 붐비지 않아 관광에는 불편이 없어 좋았다.    

  

거북바위

사원을 내려와 주차장에 이르니 각종 관광차량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푸르공’이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나라 흰색 봉고처럼 생겼는데 험한 길을 달려야 하는 관광에 최적화된 차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게 생겼다.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거북바위였다. 거북바위에 도착해서도 어느 것이 거북바위인지 헷갈릴 정도로 주변 곳곳의 바위들이 거북과 비슷하게 생겼다. 거대한 거북바위 주위를 돌며 사진을 찍고 주변의 기념품 가게에서 이곳의 상징인 칭기스칸과 게르 모양의 기념품 몇 개를 구입했다.  

  

저녁 식사 장소는 게르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의 식당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캠프’라고 했다. 우리가 삼겹살로 식사한 곳은 미라지캠프였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리조트인 셈이다. 미라지 캠프에서 일행들과 소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우리의 숙박장소인 글로리캠프로 갔다. 글로리캠프는 넓게 펼쳐진 초원에 여러 개의 게르가 흩어져 있고 입구에는 관리 게르가 있어 숙박 배정도 하고 경비도 하는 역할을 했고 캠프 중앙에는 커다란 게르가 있어 결혼식과 같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 있었고, 중앙에는 식당과 카페 그리고 숙소동이 있는 현대식 건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숙박하는 게르는 맨 입구에 있었는데 게르에 처음 들어가자 마자 최신식 게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이파이 서비스부터 넓은 침대 3개와 샤워시설 그리고 분위기를 고양하는 전기 패치카까지 갖추어진 아주 만족한 숙박시설이었다. 전면의 대형 TV로는 한국의 실시간 뉴스를 바로 볼 수 있었고, 유튜브로 좋아하는 음악을 즐길 수도 있어서 아주 좋았다. 샤워한 후 커피 한잔을 하려고 중앙건물로 가는 동안 펼쳐진 초원 위로 스며드는 어둠의 석양이 탄성을 지르게 했다. 밤 늦은 시간 게르 밖을 나와 은하수와 수많은 별들로 가득찬 하늘을 기대했으나 기대만큼의 별을 볼 수는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 보는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선명한 별자리를 즐길 수 있었다.    

산책중 만난 개울

이튿날, 식전 산책을 나섰다. 게르 주변을 따라 도로 건너 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강쪽으로 걸어 갔다.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해발 1500미터쯤 되는 곳의 숙박시설이니 우리 나라 설악산이나 한라산 중턱에서 느끼는 공기라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인지 하늘이 새파랗고 구름이 멋있게 걸리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법 걸은 후 당도한 강은 강이라기 보다는 개울에 가까웠고 물은 맑았으나 물고기는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푸릇푸릇한 풀과 야생화 그리고 물안개가 드리워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 강을 보고 난 뒤 게르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게르에서 접하는 식사는 호텔식사와 같아 부담될게 전혀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는데, 가능하면 이곳 특산물인 우유, 치즈 등의 음식으로 맛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전날 점심에는 제육볶음, 저녁은 삽겹살, 아침에는 계란 후라이와 닭고기 등을 많이 접하며 여행자를 위해 배려한 식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음식이라면 5축이라 했던 양, 염소, 말, 소, 낙타 등의 고기가 많이 나와야 할텐데 그렇지 않았다.    

오워 옆 독수리

아내와 둘만의 아침 트레킹에 나섰다. 평소 2시간 정도는 매일 걸어왔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오전 점심시간까지 자유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우리는 물, 휴지 정도만 챙기고 게르 주변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디서나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기에 특별히 어느 곳을 갈 필요가 없었다. 그냥 걸었다. 인도가 없어 차들이 달리는 도로 옆을 걷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름 모를 새들이 떼지어 나는 모습도 보고 초원 위의 불쌍한 식사감을 노리는 솔개(매, 독수리)의 느긋한 공중 회전 모습도 좋았다. 혹시 우리 부부를 노리는 것은 아닐까 약간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걷다가 가끔 산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진짜(?) 오워를 찾아 올라 갔다. 한참 올라가니 다양한 색깔의 깃발이 꽂힌 돌무지 오워가 있었는데 그 옆에는 조금 전 본 솔개 2마리가 옆에서 자리를 잡고 지켜보고 있었다. 오워에는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뼈의 일부분, 목발, 북, 가재도구 등도 보였는데 목발은 발이 나아 감사하다는 뜻으로 던져진 것이라는 의미라고 자료를 봤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북은 샤먼들이 이곳에서 의식을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몇 바퀴 돌면서 행운을 빌고 조금 더 높은 곳 꼭대기에 자리 잡은 작은 규모의 또 하나의 오워를 보고 하산했다. 곳곳의 야생화, 자연 다육이, 다양한 이끼 등을 보며 조심스레 내려왔다. 그리고는 아침에 본 개울 옆으로 이동했다. 폭은 좁았지만 S자형으로 굽이굽이쳐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이 지역의 유목민들에게는 젖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강 옆을 따라 계속해서 걷는데 시커멓고 큰 짐승 두 마리가 우리 곁은 다가오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엄청 큰 개 두 마리가 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무서워 쫓아 버리지도 못하고 한 시간 반 남짓 동행하다가 우리가 묵는 게르에 거의 도착해서야 멈췄다. 처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꼬리치며 달려드는 이 녀석들이 반가웠지만 나중에는 도로 위를 오가면서 우리를 따라 오는 바람에 차들을 급정거하게 만들어 위험하게 할 뿐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이곳 가축 몰이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몇 킬로미터까지 따라 다니며 마음대로 활보하는 걸로 봐서 그냥 내버려진 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쁜? 멍멍이들

이렇게 기억에 남을 트래킹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호박죽과 닭고기스테이크였는데 먹을만 했다. 점심 후에는 이제 테르지 국립공원 안에 있는 엘트산 트래킹을 했다. 테를지 국립 공원 내에서도 가장 경관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경사가 완만하여 편안히 걸을 수 있어 더욱 좋았는데 우리 부부는 오전에 이미 2시간 정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펼쳐지는 자연경관에 압도되어 피곤도 모른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오르막을 거친 뒤 중간 정도의 이르러 정상에서 360도 모든 방향에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확 트인 테르지 초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올라가니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 조형물이 나타났는데 이곳이 엘트산 트래킹의 정상이었다. 늑대는 몽골의 조상으로 상징되는 동물이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늑대가 많이 서식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오워가 있었고 오워형태의 샤먼들이 기거했다는 원뿔모양의 나무 주거지도 있었다. 멀리 보이는 곳에는 이곳 초원에는 보기 힘든 푸른 나무들이 비교적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곳을 나무 100그루가 심겨져 있다고 해서 백산으로 불린다고 했다. 나무 100그루 있는 곳이 유명한 지역이 될 정도로 이곳 초원에는 키가 작은 풀만 무성히 자라지 키가 큰 나무를 보기는 힘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의 남쪽은 우리가 잘 아는 고비사막이다. 사막이 전 국토의 1/3을 차지하고 동쪽은 고원지대, 서쪽은 평원지대인 동저서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나라다. 건성 냉대기후로 춥고 긴 겨울, 짧은 여름이라 식물이 자라기에 좋은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큰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셈이다. 대신 토양은 아무 곳에다 씨를 뿌려도 싹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로 굉장히 비옥하다는 생각을 했다.      

엘트산 산행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노마딕 전통문화 체험하는 곳이었다. 체험을 위한 큰 규모의 게르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유목민들의 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먼저 밀크(수태)차(우유+홍차)를 마시며 천천히 설명을 들으며 체험을 했다. 밀크(수태)차는 마시기 편했지만 말젖으로 우리나라의 막걸리처럼 만든 마유주는 목넘김이 쉽지 않았다. 증류주는 구경만 하고, 다양한 모양의 치즈는 맛을 보았다. 마유주를 만드는 커다란 가죽통, 코담배, 말 안장, 채찍 등을 구경하고 옆 방으로 이동하여 전통 복장 체험을 했다. 전통복을 입고 게르 바깥으로 초원으로 나가 사진을 찍으니 정말 그럴 듯 했다. 그리고 동물의 뼈(양의 복숭아뼈)로 만든 다양한 모양의 샤가이로 보거나 체스놀이를 했다고 해서 둘러 앉아 체험을 했다. 무엇보다 이곳 전통 악기 중 하나인 2현으로 만들어지고 말머리 장식을 한 네모 모양의 마두금이라는 현악기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악기는 나중 울란바트로에서 관람한 전통공연의 연주에서 주 악기로 사용되었다.         

저녁식사는 허르헉이라는 육류 찜요리가 나왔는데 재료는 양과 염소가 주로 쓰인다고 한다. 우리 나라 보신탕 집 개고기 수육과 같은 느낌이어서 거부감이 느껴졌으나 막상 먹어보니 괜찮았다. 나는 일행이 제공해준 소주와 같이 먹었기에 쉽게 먹을 수 있었던 반면, 평소 육류를 좋아하는 아내는 맛나게 먹기는 했는데 먹고 난 뒤 조금 힘들었는지 일행이 준 컵라면을 먹고서야 속을 달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톨강

셋째날 아침도 오전은 자유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전날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대초원의 웅장함을 느끼며 걷는 동안 낙타가 오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보니 낙타 뿐 아니라 말도 기르고 있는 곳이었는데 관람석이나 말 훈련 장소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관광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장소로 보였다. 좀 더 이동하니 이곳에서 만나기 힘든 화장실 딸린 마트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고 다시 또 이동하니 테르지 공원 입구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붉은 색깔의 다리가 나왔다. 다리는 톨강을 가로지르는 데 차량이 건너는 다리와 사람이 건너는 다리로 구분되어 있었고 사람이 건너는 다리는 붉은 색이 칠해진 나무로 아주 오래된 다리였다. 이곳으로 올 때는 차량 다리를 건너면서 빨간색 다리를 본 것이었는데 그 다리를 이제 걸어서 건너게 된 것이다. 기둥부터 전체가 나무로 된 오래된 다리였는데 군데 군데 나무가 삭아 구멍이 나 있어 구멍으로 강물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졌다. 다리밑에는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큰 나뭇가지들을 걸러내는 구조물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홍수 때를 대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리가 흔들려 고개를 드니 멀리서 소떼 한 무리가 다리를 건너려고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떻게 비켜가지? 하고 겁을 잔뜩 먹으면서도 아마 소 주인이 우리를 잘 비켜가게 할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도 용감(?)하게 전진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소행렬에서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끼리 풀을 먹으려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던 셈이다. 다행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슬금 슬금 잘 비켜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다리 위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도 차들이 소를 비켜가는 경우는 허다했다. 무단횡단의 진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참 걷는 동안 첫째날 방문했던 그 오워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거기까지 가보려 시도하다 비포장 도로의 먼지가 너무 심해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 오늘 길에 멀리서 흰색 동물 떼를 발견했다. 무슨 동물일까 궁금해하며 그들을 만나러 무작정 초원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보니 수백 마리의 염소떼였다. 마치 구름이 이동하는 것처럼 이리 저리 풀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몽골의 백화점이나 면세점에 가면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 중 하나인 캐시미어인데 바로 이 동물의 털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염소 떼를 보러 가면서 들른 일반 게르에서는 커다란 몸집의 멋진 닭이 노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지역에서는 돼지, 닭은 보기 힘든 동물이었다.  

  

칭기스칸 기마상

점심은 양고기로 만든 둥그런 찐만두였다. 만두와 샐러드밖에 없어 목넘김이 쉽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편리하고 멋진 이틀을 보내게 해준 게르와는 이별을 하고 울란바트로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여 천진벌덕(Tsonjin Boldog)이라는 곳에 세워진 칭기스칸의 기마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국 800년을 기념해 2006년에 지어졌는데 이곳은 칭기즈칸이 큰 전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행운을 가져다주는 황금 채찍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장소이기도 하다. 기마상을 얹은 단 포함 전체 높이가 50미터인데 기마상만 40미터에 이른다고 했다. 가이드의 말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마상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넓은 초원에 우뚝 선 기마상이라서 더욱 웅장하게 보였다. 여행사 안내에는 청동기마상이라 했는데, 백금 빛을 띠고 있어 강철로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강한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몽골민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조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전체 기마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조형물 안쪽으로 들어 갔다. 

안쪽에는 징키스칸 관련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가니 칭기스칸이 초원에서 정벌 중에 앉아 지휘했을 것 같은 좌석이 나왔는데 앉아서 호령하는 폼으로 사진을 남기고 이동하니 몽골제국 칸들의 계보가 나오고 옆에 엄청난 크기의 가죽신이 나타났는데 소 250마리 가죽으로 만든 신이라고 한다. 계보 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행운의 검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에는 몽골 제국 당시의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고, 샤브샤브용 솥, 당시 전사들의 갑옷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이 겨우 비켜 갈 수 있는 좁은 계단으로 한참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에 나가니 무섭게 생긴 커다란 칭기스칸 얼굴이 우리 앞으로 확 다가오는 착각을 할 정도로 기마상이 가깝게 느껴졌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기마상도 멋졌지만 거기서 둘러보는 사방 경관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로 푸른 초원과 조화를 이룬 파란 하늘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전망대를 내려 오니 주변에 관광객을 위한 말타기 체험, 낙타타기 체험, 활쏘기 체험과 같은 것이 있었다. 최근에 낙상 사고 소식으로 말과 낙타를 타 보겠다는 생각은 접고(낙타 배경으로 사진은 남김), 활쏘기 체험에 도전해서 높은 성과를 올려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제 드디어 울란바트로로 들어 섰다. 울란바트로는 몽골의 수도이고 인구는 16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반 가까이 집중해 사는 곳이다. 울란바트로의 뜻은 ‘붉은 영웅’이라고 한다. 울란바트로가 시로써 자리잡은 것이 1924년부터란 것으로 보아 사회주의의 느낌을 갖고 있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란바트로에서 우리가 묵은 숙소는 스카이블루 호텔로 돛 형태로 되어 있는데 몽골에서 가장 높은 빌딩(105미터)으로 울란바트로의 중심 수흐바트르 광장 앞에 우뚝 서 있는 호텔이다. 모양이 독특해서 어디서나 금방 눈에 띄는 호텔인데 한국인이 100% 투자했다는 호텔이어서인지 더 친근감이 가는 호텔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이동한 곳은 몽골전통공연장이었다. 공연장은 호텔 가까이 있었으나 도심 중에 도심답게 엄청난 사람들도 붐볐다. 불금이라서 더 그렇다고 했다. 공연장에 10여분 늦게 도착하여 앞 부분은 놓쳤는데 1시간 30분 정도 공연이 진행되는 피곤함에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공연 내용 중에 ‘흐미’라는 몽골 전통의 신비한 노래, 마두금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 악기 연주, 화려한 전통 복장이 우리 눈길을 끌었다. 공연 중에 ‘아리랑’연주도 들려줘 관객의 대부분인 한국인들의 호감을 끌기도 했다. 흐미는 몽골의 전통 배음 창법으로 몽골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의 소리를 목소리로 낸 것이라 한다. 한 번 부를 때 2개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요들송을 부르는 것보다 난이도가 높다고 한다.   

 

전통공연까지 마치고 저녁 식사하기 위해 울란바트로 도심을 이동했다. 저녁 8시 경에 출발했는데 5km 남짓 거리를 30분 이상 걸릴 정도로 도심이 차와 사람으로 엉켜서 엉망이었다. 운전자를 자세히 보니 운전사가 좌측, 우측 운전 모두 허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보니 교통이 더욱 무질서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알고 왔지만 CU, GS25,뚜레쥬르, 탐앤탐스, 카페베네, 이마트 등 다양한 한국 브랜드들이 울란바트로 도심을 채우고 있어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스타벅스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특이하게도 승용차는 거의 전부 일본차였다. 한국 브랜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가이드에 따르는 이곳 사람들은 가정당 평균 2~3대씩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차량은 대부분 일본 하이브리드 차량이라고 했다. 내구성과 효율성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침략도 있었지만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중국의 그것과는 다르고 크게 적대감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버스와 같은 대형차량에는 한국의 현대나 대우 브랜드가 많이 눈에 띄였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교통 체증을 뚫고 도착하여 먹은 식사는 양갈비였다. 양갈비는 허르헉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음식이었는데 매콤하게 요리되었고 고기가 부드럽고 먹기 편했다. 

돌아오면서 다시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 느낀 점은 울란바트로는 초원에서 이틀간 보내면서 정화된 폐를 금세 원래 수준으로 되돌려 놓는 곳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도심이 매연으로 가득차있다는 생각이었다. 여름 여행은 그래도 좋은 편이라 한다. 울란바트로는 평균 영하 23도에 이를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다. 그래서 겨울에는 이 나라 땅에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석탄(세계 2위)으로 난방을 하기 때문에 공기 오염도가 최악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수천 명이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한다는 기사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느낀 바로는 수많은 차량과 사람에 비해 그렇게 오염도가 심하지는 않다는 생각이었는데 여름인 이유도 있고 차량 대부분이 하이브리드라서 그럴 것이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날 여행도 아침 산책으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전날 저녁 가이드가 얘기했던 서울의 거리를 가보기로 했다. 우리 테헤란로와 같은 개념인데 중국인의 거리도 있고, 심지어 남양주의 거리도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건물과 음식점이 즐비할 것으로 기대하고 갔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수많은 포차가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이 개학을 준비하는 시즌으로 학용품 판매를 위한 매장이었다. 나중에 방문한 국영백화점에서도 학용품과 교복 준비를 위한 매장을 별도로 설치해 둘 정도로 이곳에선 이 시기의 개학 관련 학생상품은 큰 마케팅 이벤트 꺼리인 듯 했다.   

   

숙소인 블루 스카이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이곳 국립극장과 설립자 동상, 몽골 최초의 외교관 기념물, 몽골의 유명한 수상 동상 등을 볼 수 있었고, 돌아오면서 우리가 묵은 블루스카이 호텔 앞이 수흐바트르 광장이어서 국회의사당을 비롯해서 우체국, 오페라하우스, 박물관, 시청 등 주요 관공서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날 일정은 이태준열사 기념 공원 관람부터 시작했다. 이태준열사가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몽골에 특히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태준 열사는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고 이때 안창호 선생과 친분을 쌓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몽골에 가서 의료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하였다 한다. 몽골에서는 제국시대 마지막 왕인 복드 칸의 주치의(어의)로 있으면서 몽골인 치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워 몽골 최고 훈장까지 받은 분으로 몽골의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을 하던 중 38세의 나이에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원은 몽골측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한국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측과 함께 기념관을 재건축 중이어서 일부만 관람할 수 있었다. 이곳에 서 있는 비석은 가무덤에 세워진 것으로 피살된 후 실제 무덤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국 땅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면서 현재의 우리나라가 이런 분들의 희생에서 출발되었다는 생각해 숙연해졌다.    

     

자이승 전망대

이태준열사 기념 공원 바로 옆에는 자이승 기념탑이 있었다. 이곳은 소련과 몽골 군대가 연합해서 1939년 일본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한 기념과 희생된 무명 용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인데 시내 전역을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탑으로 올라가는 높이는 600계단 쯤 되는데 에스컬레이터로 반쯤 올라가고 나머지 300여 계단을 올라가면 꼭대기에 다다른다. 꼭대기에 이르는 동안 거리의 기념품 판매하는 분들이 팔찌, 목걸이, 지갑 등을 싸게 팔면서 관광객의 호기심을 끌었지만 품질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는 타일로된 벽화가 둥그렇게 되어 있고, 중간에는 삼각뿔 형태의 큐빅형태의 화로에는 과거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념 행사 때만 불을 붙인다고 한다. 이곳에서 시내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도심에는 현대식 빌딩과 아파트, 가옥으로 빽빽하였지만 도심을 벗어난 외곽의 산등성이에는 하얀색의 게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초원에서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 유목민들이 주거비가 높아 도심에서 거주하기는 힘들고 산에 게르를 지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꼭대기의 타일로된 벽화는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었는데, 전쟁의 시작, 죽은 러시아군을 안아주고 - 러시아군에 대한 몽골여인이 감사 – 일본군에게 승리 – 나치군에게 승리 – 전쟁 끝나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들이 사람들이 있건 말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이어서 수흐바트르 광장으로 갔다. 수흐바트르는 누군가? 이 나라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몽골이 270여년의 장기적인 지배 받은 끝에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한 한 것이 1911년이다. 1912년부터 제국시대의 마지막 왕인 복드 칸이 1919년 동안 독립된 나라를 다스리지만 청나라 멸망 후 들어선 중화민국의 침략을 받고 다시 독립이 물거품이 되자 수흐바타르가 1917년 러시아혁명을 보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무장독립 투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군 앞에 상대가 되지 않자 쏘련의 레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1921년 7월 10일 혁명을 성공하여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래서 수흐바트르는 몽골인에게 독립의 아버지로 불린다. 몽골의 기념일 중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 혁명기념일인데 이를 기념하여 5일간(7월 11일~15일) 나담축제가 열린다.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수흐바타르 기마상이 서 있다. 이곳은 수흐바트르가 탄 말이 오줌을 샀던 장소라 한다. 광장 전면에 넓게 펼쳐져 있는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다. 국회의사당 건물 전면 중간에는 칭기스칸이 앉아 있고 좌측에는 실질적으로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2대 칸인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우측에는 그의 손자로 중국의 금나라까지 정복하고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 앉아 있다. 그리고 중간에 말을 타고 칭기스칸 좌우를 호위하고 있는 장수는 칭기스칸 시대 사준사구의 멤버인 보오루츠와 무칼리다. 사준사구는 네 마리의 준마와 충견을 일컫는데 몽골제국을 만든 8인의 건국공신을 말한다. 사실 이러한 동상들은 비교적 최근에 건립되었다는데 공산주의 시대에는 칭기스칸이 폄하되었고 함부로 말하는 것도 금기시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행의 마지막 장소는 몽골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역시 수흐바르츠 광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박물관 앞의 독특한 조형물이 상징하는 설명부터 들었다. 몽골숙청 시대의 고통을 표현하는 조형물이었는데 몽골이 공산화가 되면서 생긴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좌측에는 오래된 낡은 종이 있었는데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몽골역사박물관은 총 3층 9개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고 선사시대로부터 근대 역사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가이드 설명을 듣고 순간 순간 지나칠 수 밖에 없었지만 몇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을 보면 이렇다. 초반에는 몽골의 선사시대의 각종 유물과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분벽화가 여럿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벽화로 보였다. 자료에 보면 4만 년 전 벽화가 있다고 했는데 어느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음은 칭기스칸부터 시작하여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 칸에 이르기까지 몽골제국시대 유물이다. 이때는 노마딕체험에서도 본 여러 복장, 악기, 말과 관련되는 기구들과 같은 생활용품과 전쟁에 필요한 갑옷, 활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은 270여 년간 청나라 지배기간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청의 영향을 받은 복장, 신발 등의 모습과 각종 고문기구(뒤주 감옥이 인상적이었음)들이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세운 복드 칸(1912-1919)시대 각종 기록과 사진들이 있었다. 복드 칸 부부의 초상화도 있었는데 복드 칸은 몽골 불교지도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가이드가 복드 칸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 준다며 복드 칸이 사망한 이유를 맞춰 보라고 했다. 불교승려이기도 했던 복드 칸의 사인이 매독이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이태준열사가 복드 칸의 주치의기도 했는데 이 당시 몽골인의 70% 가량이 성병에 걸려 그것을 치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얘기도 있어 그 연결성이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1990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몽골의 민주화 시기의 인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몽골역사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두꺼운 납작만두였다. ‘나혼자 산다’에서 나온 음식이라는데 만두 안에는 양고기가 들어 있었는데 먹을만 했지만 저녁 마지막 식사로는 다소 아쉬웠다. 점심 때 먹은 샤브샤브 요리와 순서가 바뀐 느낌이다. 점심 때 샤브샤브요리는 모두 만족한 요리였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샤브샤브 요리에 고기가 세 가지 종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고기, 소고기, 양고기다. 고기 맛은 구분 가능할 정도로 달랐는데 일행 들이 한결같은 평가는 말고기가 가장 부드럽고 맛있다고 했다. 제주도에 말고기 먹으러 한번 가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소화할 겸 한 시간 가량 시내를 배회하다가 아쉬워 들렀던 거리주점에서 여행 일행을 만나 같이 맥주를 한잔 하고 마지막 밤을 맞았다.   

 

4박 5일간의 몽골 여행이 꿈처럼 지나갔다. 몽골이 친숙하게 느껴진 것은 역사적으로도 그 이유가 증명되고 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나라 신라의 김씨 왕조가 바로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몽골은 우리 고려시대를 지배한 적이 있고 한국전쟁 때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로서 인민군을 지원한 적도 있다. 아주 오랜 역사로 보면 우리는 하나지만 역사가 흐르는 동안 우리의 적이 되기도 했다가 지금은 아주 가까운 나라가 되어 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민중은 하나지만 그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형제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잠시 동안이지만 아주 멀리서 형제국가를 본 느낌을 가지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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