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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의거북 Jul 30. 2020

[방황하고 있습니다] 통증을 만나는 시간

통증을 만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요즘 나의 상태는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인생 노잼 시기’의 증상과 비슷했다. 

직장인 사춘기라고도 하는 그 증상은 이렇다.     


1.만사가 귀찮음

2.아무것도 재미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음

3.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회의감만 듬

4.억지로 인간관계 맺고 싶지도 않음

5.잠이 안 오고 새벽에 감성 터짐

6.미래에도 이렇게 살 것 같은 부정적인 기분이 듬

7.직장이고 뭐고 그냥 좀 쉬고 싶음

8.어느 순간 괜찮아짐 그리고 또 반복됨     


 많은 사람들이 ‘인생 노잼 시기’를 겪나보다, 이런 리스트까지 도는 걸 보면.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통과할까? 나보다 몇 살 위인 한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도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해질 때가 있어요?”

"네, 있죠. 그럴 땐 그냥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려고 해요.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하죠."

"아. 시간을 잘 흘려보내는 거. 뒹굴뒹굴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네. 그냥 흘려보내는 거예요. 나이질 때까지."

"그 생각은 못해봤어요. 빨리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걸 잘 못하는 구나.“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이 상태에서 빠져나올 간단한 방법을 안다. 자극적이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온 에너지를 운동에 탕진하면 고민하고 우울해할 시간도 없고,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운동 후 약간의 흥분감은 그날 하루를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한동안 크로스핏에 빠졌었다. 하기 싫은 일들이 점차 늘어나면 운동량도 함께 늘렸다. 운동으로 느끼는 성취감이, 삶의 불편감을 보상해줬다. 운동으로 인한 몸의 상처와 근육통이, 삶에 대한 회의감과 불만을 잊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적 도피이며, 내 방황을 끝내줄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한동안 운동을 쉬고 있던 내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선택한 것은 요가였다. 이 무기력한 시기를 잘 흘려보내기 위해 힘을 빼고, 숨을 쉬고, 몸의 균형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요가를 하고 일상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았겠지만...

평소에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런지 요가는 운동보다는 ‘벌을 받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요가 첫날의 프로그램은 시바난다 요가였다. 호흡과 이완을 중심으로 하는 요가인 듯 했다. 요가 선생님을 따라서 생소한 동작을 하나하나 이어 나갔다. 힘든 자세로 버티다보니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다. 어렸을 때 뭔가를 잘못해서 선생님께 벌을 받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앉아 있노라면 팔이 저리고 다리가 저려왔다. 시간은 지독히도 안 갔다. 서른이 넘어서, 다시 벌을 받기 위해 돈을 쓰고, 시간도 쓰고 있다니. 평상시라면 쓰지 않았을 작은 근육들을 고통스럽게 깨워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내게 다가왔다. 내 아랫배를 꾹꾹 누르며 힘을 빼라고 했다. ‘힘 빼세요~’ 그때 깨달았다. 힘쓰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재차 말했다. ‘힘 빼세요~’ 울고 싶었다. 힘을 대체 어떻게 빼는 건데요 선생님...     


 그러고 보면 힘내라는 말은 응원의 말, 긍정적인 말로 많이 쓰이는데

힘 빼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다. 실은 힘을 뺄 필요가 있는 타이밍에 우리는 힘 빼는 방법을 몰라서 어리석게도 계속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 정도에서 포기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모질게 굴며.


 힘을 빼는 것은,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펴고 손바닥을 내보이는 것.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 그렇게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것이다.      

 괜찮다, 이만하면 괜찮다. 애썼다, 그 마음 안다. 이제 힘 빼도 된다.      


 수업 막바지에는 매트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요가 선생님이 나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늘 긴장하고 있어서 몸이 수축되어 있는 거예요. 평상시에는 수축되어 있는 것도 잘 몰라요. 그래서 어떻게 비워야할지 어떻게 힘을 풀어야할지 막막하다는 거 알아요. 동작을 하다보면 불편할 거예요. 통증을 느낄 거예요. 통증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어요. 통증을 만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나는 지금 내 삶의 통증과 만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그게 방황이구나. 방황하지 않고 일시적인 만족감을 찾아서, 내 삶은 이정도면 괜찮다고 위안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잠시 뿐이다. 이 방향을 잃은 듯한 불편감은 언제고 나를 다시 찾아올 거다. 마흔의 나에게. 혹은 예순의 나에게.      


 방황을 시작한다는 것은 삶의 통증과 만나는 것이다. 내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직시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이다. 고통을 마주 보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방황은 누구도 응원하지 않는 외로운 길이다. 밤에는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내일이 오지 않을 듯 절망스럽고, 평소 재밌게 보던 예능은 이제 따분하고 심지어 슬프다. 하루종일 뭔가를 열심히 한 듯 하지만 헛헛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온전히 나의 삶.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답이 존재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      


한동안 이런 밤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 

최선을 다해 방황하며, 힘을 빼고, 결국에는 숨어있는 좁고 반짝이는 그 길을 찾아내고 말거니까.                

도움이 된 책 :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 - 고코로야 진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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