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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언 Jan 20. 2021

미안하지만 나도 겨우 ‘엄마 열두 살’인 걸

엄마력을 살아내고 있는 엄마들에게

엄마력(曆)이 있다. 출산을 기점으로 엄마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이들을 위한 기년법, 엄마력. 이러니까 무슨 내가 연호를 정하는 국왕이 된 듯하지만, 출산하고 육아라는 대환장 신세계를 겪고 있는 모든 엄마는 아이 나이와 같은 엄마력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첫 아이가 한 살이면 엄마도 한 살, 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엄마도 자연스레 일곱 살이 된다. 나는 2021년 엄마력 13년 차다.


대부분의 엄마는 첫 아이와 함께 엄마를 처음 경험한다. 엄마가 되자마자 겪게 되는 수많은 일은 대부분 다 처음 겪는 것인 데다 누군가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 부분도 생각보다 많다. 정보가 없거나 너무 많아도 처음인 엄마들이 어려운 건 매한가지. 어느 육아서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문구처럼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다.


같은 엄마력을 살아가는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이의 발달과정을 따라가니 조리원 친구, 문센(문화센터) 친구, 어린이집 친구, 유치원 친구, 학교 친구, 학원 친구, 성당 친구 등이 매년 새로 생긴다. 게다가 이 관계는 사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보다 곱절은 공감대 형성이 쉽고 이해의 폭이 상당히 깊어지는 관계가 되곤 한다. 아이 친구 엄마였는데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는 현상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엄마력이 좀 되다 보니 이젠 익숙하다.


엄마력 초창기에는 그렇게 어설플 수가 없었다. 잘 알던 사실도 한 번 더 의심해보게 되고 검색하여 숙지하지만, 번번이 자신의 여물지 못한 선택의 결과에 후회와 좌절을 하기도 했다. 나는 며칠을 고민해서 결정한 일들이 선배 엄마들을 만나면 아쉬운 선택이 되기도 했고, 단단해지지 않은 마음은 높은 엄마력을 가진 이들의 말에 생채기 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십 년이 넘어가니 이제 웬만한 일에 쉬 흔들리거나 상처 받지 않는다. 많은 일이 그럴 수 있다 싶다. 사실 이렇게 변한 것도 다름 아닌 아이들 덕분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력으로 인해 어려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나름 깔끔하고 똑 부러지게 일 처리를 해내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좋은 게 좋은 거고, 유하다 못해 우유부단하거나 결정을 내리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귀가 얇고 흔들리는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사실 이보다 더 많이 흔들리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겁이 났던 적이 많다. 활동 반경이 넓고 유난히 체력이 좋은 둘째는 자주 부러지고 까지고 꿰매야 했다.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많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가장 겁이 났던 일은 바로 ‘내가 하는 이 선택이 아이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라고 생각될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며 논리적으로 결정한 일이지만, 아이가 진정 원하지 않았을 수 있고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하기 전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낸 적도 많다.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가 했던 선택들도 정작 나에게 별 도움이 안 되었던 일도 있고, 정말 하기 싫었던 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 어떤가?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진 결정들은 엄마의 선택이었던가, 본인의 선택이었던가?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의 결과가 닥쳤을 때 아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미안하지만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라 이런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고, 엄마도 이제 겨우 엄마 열두 살이라고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세계를 하나 만드는 일이라 했다. 아이의 세계를 엄마 혼자의 힘으로 전부 만들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세계의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은 엄마의 힘으로만 할 수 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요즘처럼 아이들과 매일 집에서 겪어야 하는 일상이 지칠 때 가끔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고, 세계 만드는 일이 쉬울 줄 알았냐! 지치지 말자!’


엄마력을 살아가면 내 나이 한 살 느는 건 무감각해진다. ‘내가 언제 서른아홉 여행을 다녀왔나’보다 ‘내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가 더 빨리 인식되니 말이다. 벌써 2021년 새로운 해가 밝았다. 내 나이보다 엄마력으로 중요한 한 해가 될 올해 나는 엄마력 13년 차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물리적 나이에 집착하지 말고 엄마력 13년에 걸맞게 운동하고 산에 다니며 신체 나이를 더 젊게 만드는 한 해로 만들 예정이다. 엄마는 이렇게 아이와 함께 계속 자랄 것이다.



여성독립매거진 2W 매거진 7호 <여자의 나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이 달의 글로 선정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https://m.blog.naver.com/2yjyj/222213182308

http://aladin.kr/p/eyn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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