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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언 Mar 23. 2021

2011년 습작 노트를 꺼냈다

당신을 열어 본 지 벌써 십 년이나 되었네요

큰 아이 4살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 중반이었겠지.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나는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했지. 그때까지도 나는 꿈이 있었으니까.

"엄마는 그림책 작가가 되어 볼로냐에서 상을 받는 거야."

나는 꿈이 있어 다행이라고, 아이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가슴속에 품은 꿈이 있어 다행이라고 적었던 날이 있었다. 


지금이야 '볼로냐 아동도서전(Bologna Ragazzi Award)에서 상을 받는 국내 작가가 계속 늘어나고 볼로냐 관련 전시회도 매년 열리니 많이들 알겠지만 그때만 해도 볼로냐 도서전에서 라가찌상을 받는다는 건 그림책 작가나 편집자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일이었을 때다.  

나는 그림책 편집자로 일을 했었고 큰 아이 임신으로 인해 볼로냐 도서전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라 내 작품으로 그 자리에 서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 되었었다. 퇴직을 하고 다른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되면서도 나의 꿈은 늘 '볼로냐에 가는 것'이었다. 


꿈만 꾼 건 아니었다. 퇴직 후에도 꾸준히 그림책 원고를 습작해왔고 그림작가들과 관계를 유지하곤 했었다. 그런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건 연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더라. 


호흡이 긴 창작 그림책 작업은 보통 2년 정도의 작업 시간이 걸리고 그 기간 동안 작가와 편집자는 수많은 조율을 거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낸다. 그러다 보니 다른 단행본보다 더욱 정이 가고 오래 기억 남는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림책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이어지는 육아와 호흡이 세 배는 빨라진 새로운 일터에서는 글 쓰는 기계처럼 글을 뽑아내고 나면 내 그림책 원고를 쓸 에너지를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꿈은 멀어져 갔다. 


나에게 꿈을 물었던 큰 아이는 어느덧 초등 고학년이 되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진로를 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같은 기간을 보낸 엄마는 그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오늘 2011년 습작 노트를 꺼내보니 반성과 아쉬움이 가슴속에서 물밀듯이 밀려온다. 


지금 나에게 꿈이 무어냐 물으면 같은 꿈을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다른 주제로 책 한 권을 냈고, 이제 곧 다른 책도 나올 예정이다. 

그림책 작가는 여전히 나의 로망이지만 급하게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는 십 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비슷하게 느껴지니까. 그때의 감성과 지금의 감성을 더해 멋진 그림책을 내고야 말리라.


함께 그림책을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내고 습작 원고를 보낸 뒤에 답이 없는 못난 글작가가 오늘은 기필코 완성된 원고를 보내리라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나오니까 좋다> 김중석 작가님 원화전시회에서_비플랫폼, 합정



그림책 작가들의 작은 전시를 보러 가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전시에는 늘 습작 노트가 있었고 거기서 발전되어 이런 그림책이 나왔답니다, 라는 서사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림작가는 아니지만 나의 십 년 전 습작 노트를 열어보니 무언가 뭉클한 것이,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 싶더라고요.


혼자 벌교 여행을 갔던 때,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조정래 작가가 그 복잡한 태백산맥 주인공 계보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 계속 업데이트해두었던 노트 한 장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대 작가님도 수시로 메모하고 업데이트하는데 우리는 더 많이 기록하고 업데이트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 세상의 빛을 보게 될지 모를 나의 습작들을 기르고 계신 많은 분들께, 가끔 노트를 열어 숨 좀 불어넣어주시라 이야기해봅니다. 봐야 업데이트도 해줄 테니까요. 모두 건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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