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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r 14. 2024

우연과 필연의 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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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온 딸이 교문을 나서자마자 내게 한 말은 뜻밖이었다. 시험지와 OMR카드를 받고 시험시작을 기다리던 아이는 책상 한쪽에 놓아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찬찬히 보게 되었는데 이름의 마지막 한자가 달랐던 것이다.


(동산 원)이어야 할 한자가 圓(둥글 원)으로 되었다 해서 그 날밤 남편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노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아이의 주민등록증을 가까이 놓았다 멀리 놓았다 하며 네모난 박스 안의 한자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것과 정말 다른지 확인해 보았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이 잘못을 정정해야 한다며 동사무소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이름은 수정이 될 당시의 집안 사정, 태몽, 태명, 작명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서사가 있었다. 그리고 자라면서 알게 된 서사에 매료된 아이는 자신의 이름에 사명감 같은 느낌을 가졌던 모양인지 무척 좋아했다. 




올해로 19살(연 나이)이 되는 아이가 뱃속에 자리 잡았을 때 친정아버지는 큰 결심을 하셨다. 지난하다 못해 처절했던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엄마를 설득하여 낡디 낡은 4칸짜리 한옥이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는 할아버지 유산으로 물려받은 선산과 사과밭이었던 3,000 여평의 땅이 있다. 아버지는 사업의 흥망과 상관없이 그곳을 마음의 안식이자 여차하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집 이상의 의미, 삶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셨다. IMF 시기에도 그곳만은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어느 정도 사업이 원만하게 추슬러지자 농대를 나온 아빠는 고향에서 평생의 꿈을 실현해 보리라 다짐하셨다.


당장의 수입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5년만 잘 키우면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가로수용 나무를 키우고 소소한 과일나무와 직접 벼농사도 지어 자급자족 자연인의 삶을 기대했던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삿짐 트럭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들과 방치된 뻐얼건 황무지 땅만이 아버지와 엄마를 맞이했다. 그 땅 한쪽에 50년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아 여기저기 허물어지기 직전의, 당장 살아야 할 한옥이 있다. 그런 한옥에 제대로 된 부엌이 있을 리 만무하며 한옥 한 편에 시멘트 블록으로 허술하게 지어진 푸세식 외부 화장실 역시 여차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게다가 부모님이 살만한 집을 짓기 위한 전재산 3천만 원마저 작은 아버지께 빌려드리고 나니 수중엔 한 푼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셨다.


나는 부모님이 내려가시고 일주일 후에 3살 된 아들의 손을 잡고 뱃속에 딸아이를 품고 내려갔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얼굴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발견할세라 서둘러 그곳의 장점을 지어내서 마구 떠들다 2평이 채 안 되는 한옥에서 잠이 들었다. 그 밤 나는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에 잠이 깼다. 어느새 깜깜했던 창호지 너머의 바깥이 훤히 밝아져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방문을 밀어내니 온 세상이 색색의 꽃과 나무로 가득 차 있었고 생전 맡아보지 못한 청량한 향기 사이로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고향집으로 몰려들었다. 와 너무 좋다! 정말 멋지네! 갖가지 찬사와 감탄을 쏟아내며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하루아침에 황량한 땅이 이토록 황홀한 정원으로 변신한 게 수상할 만도 한데 나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생각나 엄마를 불렀다.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어느새 내 어깨를 흔들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이었다. 태몽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생길 때마다 태명이 평생 이름이 되길 바랐다. 첫째의 태명은 '현중'이었다. 그러나 양가 부모님은 유명 작명가에게서 받은 이름이어야 한다며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하셨다. 작명가들은 아이의 태어난 시간을 따져 여러 이름은 지어주었는데 그 가운데  '현중'이란 이름은 없었다. '현중'의 한자들이 아이의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아쉬워하며 받아 온 이름 중 가장 중성적인 이름을 선택했다. 내가 너무 남성성이 강한 한자 - 이를테면 '태', '웅'과 같은 - 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둘째가 생기고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남편은 '려원'이란 이름이 이쁘다고 했다. 그러나 발음이 어려워 '여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뱃속 아기에서 평생 쓸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내 새끼가 진짜 살아있다는 사실을 부를 때마다 매번 실감할 수 있는 기쁨을 준다. 나는 심심하면 아가의 이름을 불러댔다. 마침내 둘째가 태어나자 나는 이번만은 태명이 평생의 이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님께 '여원'이란 이름의 한자를 받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아버님은 이번에도 '여원'은 둘째 아이의 사주와 맞지 않는다고 들었다며 다른 이름을 보여주셨다.


나그네 려(旅), 동산 원(園)

태몽과 나의 바람이 이토록 극적으로 연결된 이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연과 필연의 작명이었다. 이때부터 둘째는 존재만으로도 서사적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고향집에 정착한 이후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오른 땅값을 담보로 대출이 가능해지자 한옥 옆 대지에 조립식 주택을 지으셨다. 소일 삼아 심었던 매실나무들이 결실을 맺자 뜻하지 않은 부수입도 생겼다. 그 돈으로 틈틈이 한옥을 고치거나 계절마다 늘 환한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도록 꽃 정원을 만드셨다. 자꾸만 길을 잘못 든 외부인이 집 앞마당까지 들어와 이런 외진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며 말을 거는 통에 철제 대문을 세우셨다. 


열아홉 해가 지난 지금 고향집은 마을 사람들의 지인들이 놀러 오면 꼭 보여주고 싶은 공간이 되었다. 아버진 마을 노인회 회장에 연임되셨고 귀향 이후 숨죽여 살던 엄마는 본의 아니게 회장님 사모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다. 절의 총무를 맡아 대내외적으로 늘 바쁘셨던 25년 전 이후 처음으로 하시는 사회활동이라 그런지 신이 나 보였다. 엄마는 우리 딸의 태몽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희망이 하나 둘 기적처럼 이루어질 때마다 그 이름이 각별하게 다가왔다고 하셨다.




매일 저녁 엄마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둔 수첩을 펼쳐놓고 금강경을 읽으시며 기도하신다. 이런 엄마에게 딸의 주민등록증 한자가 다르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평생 기도한 한자가 아니니 당장 바꾸라고 하셨다. 딸은 그래서 할머니 기도빨이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며 동사무소를 찾아가 정정을 요구했다. 직원은 출생신고 시 한자가 잘못된 거라 개명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개명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막상 바꾸려니 좀 머뭇거리게 되었다. '둥글 원'도 이름 해석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우선은 작명어플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넵유베(작명어플)를 다운로드하여 딸의 이름을 한글로 적고 태어난 년월일시를 입력하니 이름에 준하는 다양한 한자들을 선택하라고 했다. (동산 원)이나 圓(둥글 원) 모두 획수가 동일하여 성명학 풀이에는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이름이 가진 의미 역시 발음상의 어려움 말고는 아주 좋았다. 그럼에도 딸의 개명신청 의지는 확고했다. 


이쯤 되자 우리 가족의 이름 풀이가 궁금해졌다. 작명가로부터 하사 받은 남편과 아들(첫째)의 이름은 아주 훌륭했다. 음...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내 이름은 할아버지보다 오래 사셨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에 흠씬 놀라 아버지가 몰래 따로 지어주신 이름이다. 넵유베의 결과는 부르기도 어렵고 내 사주를 보완하는 이름도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말년 운이 좋다는 해석이 한 줄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애증의 이름, 남편만이 놀리듯 불러주는 그 이름, 증조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봄 춘(春), 아름다울 미(美)'를 입력해 보았다.


결과는... 짜잔!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능가할 만큼 좋았다. 발음음양을 뺀 나머지 5개 항목(발음오행, 사격수리, 수리오행, 수리음양, 사주오행)에서 '매우 좋음'이 떴다. 순간 나도 개명을 해야겠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렇지. 그래서 내 인생이 힘들었던 거야' 마음을 다독이며 옆에 있던 남편에게 개명의사를 전했다. 남편은 지금보다 더 많이 불러줄 테니 참으라 말렸다.


요즘 세상에 '춘미'로 개명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개명통계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춘미'로 개명한 사람들은 2014년에서 2020년까지 총 27명이란다. (2021년 이후 현재까지는 단 한 명도 없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어 심심한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졌다. 내 비록 개명까지 하기에는 지금의 이름이 나쁘지 않아 보류 중이지만 일이 풀리지 않을 때를 대비해 '춘미'로 명함 하나 마련해 볼까 한다.



https://brunch.co.kr/@alonghyo/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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