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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Feb 15. 2024

애쓰지 않는 시시한 일상

2402120919

1월 말 퇴직금 중간정산이란 명목으로 목돈이 들어왔다. 생전 처음 그렇게 큰 숫자가 내 통장에 찍혔을 때 경제관념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나는 수만 가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 꿈에는 친정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집의 2층 증축공사에 공사비 일부를 보태어 에어비앤비 가능성을 높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딸과 최소 2주 이상의 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수고했던 나를 위해 큼지막한 선물 하나를 사고... 또 뭐가 있더라... 하하! 그러나 그다음 날 할부 잔여금이 포함된 3장의 카드값을 미리 결제하고 나니 통장 잔고는 입을 크게 벌려 초코파이 한입을 베어 물고 남은 초승달 모양과 같았다.


이미 사라져 버린 숫자는 우리 가족의 의식주에 큰 역할을 해서 사라진 게 아닌데도 안타까운 마음이 점점 커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식이면 남아 있는 숫자도 머지않아 생활비로 사라질 텐데... 그전에 다른 건 어렵다 해도 나를 위해 뭔가 하나는 꼭 사야겠다는 다짐이 강박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찰떡인 돈값하는 명품하나를 살 수 있을까 눈만 뜨면 백화점과 아웃렛을 돌아다니며 가방이나 코트, 패딩 등을 고르고 골라 메고 입고 벗길 수십 번. 집으로 돌아오는 내 손엔 그저 그날그날의 저녁거리만 들려있을 뿐이다. 맘에 드는 건 예산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고 예산범위에 들어온다 해도 줄어드는 잔고 생각에 선뜻 카드리더기에 카드를 꽂는 일까지 성사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을 쉰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가고 구정 연휴도 끝이 났다. 아직도 내 것이 되지 못한 ‘제대로 된 명품하나'에 정신이 팔려 그렇게 애착했던 책도 글도 시시해졌다. 돌이켜 보면 지난 7년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나 신기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어떻게든 잘해보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고 틈만 나면 브런치를 들락거리며 글을 쓴다고 또 머리를 쥐어짜고... 다시는 못할 것 같고 그래서 더는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참이다.




아침 7시, 고양이들의 꾹꾹이를 받으며 잠이 깬다. 서두를 것 없이 믹스커피 한잔에 버터롤 한쪽이면 충분한 소소한 아침거리를 TV앞에 펼쳐두고 홈쇼핑을 본다. 남편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날밤 씻어놓은 텀블러에 커피를 내리고 사과 한쪽을 깎아 식탁 위에 올려둔다. 남편은 사과를 입에 물고 텀블러를 챙겨 곧바로 현관을 나선다. '잘 다녀와!' 나는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재빨리 인사를 한다. 일하지 않는 자의 미안함이 밴 몸짓이다. 남편은 '얼른 자!'라고 화답한다. 하릴없이 거실과 안방을 돌아다니며 고양이 털뭉치를 줍고 또 줍다 고양이들을 웃으며 째려본다. '이노무 시키들! 또 간밤에 신나게 잡기놀이했구먼.’


9시 30분, 아들과 딸이 아르바이트를 간다고 일어난다. 냉장고를 열어 전날 먹었던 된장찌개가 담긴 냄비를 꺼내고 누룽지를 끓인다. 딸은 두유와 체리를 먹겠다 하고 아들은 요거트 하나면 충분하다고 한다. 결국 누룽지는 내 차지다.


오후 1시, 침대에 누워 30분만 숏츠와 릴스 구경을 하다 자자고 결심을 했는데 어느새 3시간이 지나버린다. 이젠 정말 자야 해! 했지만 그새 또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다섯 시간 동안 손바닥만 한 작은 창에 등장한 수많은 이야기가 수백 장을 한 움큼 잡고 넘긴 책장처럼 순삭 되었다. 남편이 집에 올 시간이다.


오후 6시, 한숨도 못 자고 저녁준비를 시작한다. 이렇게 여유롭게 저녁을 준비하는 게 얼마만인지 잠시 행복감이 몰려온다. 아무도 없는 집안, 어스름한 노을빛 창밖 풍경을 이따금 쳐다보며 갖가지 야채들을 가지런히 채 썰어 야채 전을 부치고 육수 한알로 만둣국을 끓인다. 내친김에 밑반찬도 만들어 볼까 싶어 오징어채와 잔멸치를 꺼낸다. 기름에 볶다 다 태워버린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불 조절도 쉽지 않고 맛도 모양새도 그닥이다. 그래도 시켜 먹지 않고 오늘하루 집밥으로 가족들 해 먹였으니 스스로 대견하다 다독여본다.


요 며칠 사이의 일상 풍경이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날을 꿈꾸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무지출과 최소한의 노동으로 가족을 챙기고 아무런 죄책감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삶. 무엇보다 애쓰지 않는 시시한 일상!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럽다. 서두에 쓴 수만 가지 꿈이 무색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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