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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r 21. 2024

녹진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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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진한 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대표의 연락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축축한 느낌에 잠이 깼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샤워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눅눅한 베개를 반대로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휴직 전부터 왼쪽 무릎과 왼쪽 발바닥이 아파 다리를 구부리고 펴는 동작이 어려워졌다. 쉬는 동안 원 없이 글이나 써보자 의자에 앉으면 1시간도 못되어 어깨와 허리, 엉덩이까지 뻐근해졌다. 급기야 의자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생전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나타났다.


정형외과를 찾았다. 약도 주지 않고 회당 2~30만 원이 웃도는 도수치료를 10회 이상은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가 너무 얄미웠다. 최근에 실비보험을 들어 자기 부담금이 높아진 탓에 내겐 너무도 부담되는 비용이라 단 한번 치료받고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가동범위와 시간이 통증을 동반한 채 현저히 좁아지고 느려졌다. 평생친구 다이어트는 건강한 몸일 때만 생각나는 친구였다. 이 친구가 그리울 정도라니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게 맞는가 보다.


몸에 무리가 없던 예전엔 일을 쉬면 며칠 안 가서 '노느니 일하자'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는데... 지금은 다시 일할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 오랜 시간 앉아서 하는 컴퓨터 작업이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는 인과적 추론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젠 컴퓨터만 봐도 굳게 닫힌 묵직한 철문 앞에 선 것처럼 지끈한 두통을 동반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내 얼굴보다 큰 철퇴로 마구 휘둘러 무자비하게 때려 부수고 싶었다. 의자를 보면 귀가 먹먹한 소음을 장착한 초대형 전기톱으로 네 다리를 무지막지하게 잘근잘근 잘라 다시는 의자 구실을 못하게 앉은뱅이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날뛰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반복된 어떠한 상황으로 인해 몸이나 마음을 다쳤다면, 그로 인해 느닷없이 감정이 깊은 우물에 추락했다 미친 듯 폭주하는 상태로 돌변한다면 그건 트라우마일테다.




지난 1월 휴직을 하면서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의 발주처 대응이나 자문자료, 보고회자료 등의 업무는 계속하기로 했다. 물론 거기에 해당하는 업무수당도 지급된다. 그러다 보니 이건 쉬는 것도 아니고 안 쉬는 것도 아닌 상태로 휴직 3달째를 맞이했다. 3월 초 갑자기 발주처에서 4월 초까지 최종보고회를 준비해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대표는 여러 번 작업을 같이 해왔던 3D디자인실장과 진행을 시작하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전시관 기본계획 용역은 '1단계-중간보고, 2단계-전문가자문, 3단계-최종보고'로 이어진다. 2단계까지는 기획단계라 사내 기획팀에서 자료준비가 가능하다. 그러나 최종보고는 기획된 전시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예상완성도 개념의 3D투시도가 주된 목적이라 이때에는 3D디자인팀과 협업을 하게 된다.)


실장에게 연락하니 2주 뒤에나 작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내용도 대표에게 전달했다. 1주일 뒤 실장은 대표에게 견적서를 보냈다. 난리가 났다. 발주처와 계약한 금액의 절반 가까운 견적이 나온 것이다. 3주도 채 안 되는 작업시간에 맞추자면 추가 인건비가 불가피하다는 실장의 답변을 듣자 대표는 내게 이 프로젝트의 경과와 그동안 발주처, 실장과 주고받았던 이메일과 카톡을 다시 요청했다. 누구의 잘못인지 꼼꼼히 따져 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모든 과정에 있어 한치도 누락된 사항이 없었기에 철퇴를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고 엑셀을 열었다. 차분히 날짜별로 경과를 작성한 후 맘껏 잘못을 따져보라며 당당한 미소를 머금고 대표에게 메일을 보냈다.


실은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2월 초, 발주처는 자문이 늦어져 최종보고회 일정이 연기될 수 있다며 투시도 진행을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2월 중순, 대표는 다른 일로 디자인실장과 회의하던 중 그에게 이 프로젝트를 부탁하면서 내게 자료를 받으라고 했다. 곧 실장의 연락을 받은 나는 캐드도면과 전시자료를 챙겨주었다. 그리고 보고회 일정이 유동적이긴 하나 전시관의 건축이라도 먼저 3D로 올려놓으면 자문으로 인해 전시 내용에 변화가 있어도 내부만 디자인하면 되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장도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3월 초 발주처의 확정통보를 받고 실장에게 연락하니 그는 대표가 요청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시작도 못했다고 했다.


문제는 대표와 실장 사이의 견적이 합의되지 않으면 작업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인건비는 더 올라갈 것이다. 좀 더 단가가 낮은 다른 3D팀을 찾는다 해도 이 실장만큼 우리가 기획한 내용을 이해하고 그 이상을 보여주기는커녕 그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결국 허접한 예상완성도를 들고 최종보고회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그려지자 나를 한심하게 지켜볼 발주처와 자문위원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속이 너~무 너~무 상했다. 이것은 구형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서는 것만큼이나 모양 빠지는 일이다.


2월 중순에 시작만 했더라면, 그때 내가 정확하게 견적을 달라고 실장에게 요청만 했더라면 대표와 실장이 서로 합의 가능한 견적이 나오지 않았을까 자책이 밀려왔다. 견적 요청은 그들 사이의 일이지 나의 업무가 아닌데도 말이다. 항상 뒤늦게 일이 잘못되거나 변수가 생기면 대표는 누구의 잘못인지 파악하는 걸 우선순위에 둔다. 발주처의 잘못이라면 일의 주도권을 챙기고, 직원의 잘못이라면 불같이 화를 내고, 협력업체의 잘못이라면 집요하게 추궁하여 견적을 깎는다. 그런데 신기한 건 대부분은 본인 탓이 젤 크다. 이런 성향을 오랫동안 봐온 나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일의 양이 많아 컴퓨터와 의자를 탓했지만 실은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당한 미소는 개뿔, 내 마음을 숨기려고 나도 모르게 짓는 위장술에 불과했다.


이 사달이 난 날이 지난주 수요일이다. 초조한 마음을 견디다 못해 금요일 저녁 대표에게 연락을 했다. 대표는 아직도 조율이 안되고 있다며 주말까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3D디자인팀과 협의해서 준비할 사항이 많아 마음이 조급해졌다면서 대표님이 고민이 많으실 텐데 연락드려서 죄송하다고 했다. 대표는 이렇게 톡을 보냈다.


'발주처와의 계약금액이 너무 적어서 생긴 문제지요. 전선생님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대표의 톡은 울리지 않았다. 오후 서너 시쯤 땀범벅으로 뒤척이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톡이 울렸다. 대표였다. 발주처와 이야기해서 최종보고회를 5월 중순까지 미뤘고 기간이 늘어난 만큼 디자인실장과도 견적조정이 되었으니 바로 진행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대표자리에 있는 거였다.


드디어 숨이 내쉬어졌다. 누가 들으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라 비웃을 것만 같았다. 이토록 그릇이 작아서 세상을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녹진한 하루였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글을 시작하면서 '녹진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더니 앵? 전혀 다른 뜻이었다.



그럼에도 이 단어가 풍기는 어감이 오늘하루와 닮아서 첫 문장으로 쓰고 싶었다. 다 쓰고 나니 알겠다. 녹다운(knockdown)과 진이 빠졌다는 말이 합쳐져 '녹진하다' 가 떠올려졌음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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