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어떤 배타적인 목적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몇 차례 읽어보려고 했지만 그 시도가 불발되었던 탓이다. 정확히 책을 ‘못 읽었다’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안 읽은 것이 되었다. 이 책이 한국 페미니즘의 성서처럼 떠받들어져서는 아니었다. 문학적으로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나서는 아, 그렇다면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냥 시큰둥했다. 속으로는 만들어질 그 영화가 원작의 아우라에 기댄 아류쯤이 되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곤 영화를 봤다. 결론적으로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비껴나갔다. 이 영화가 원작의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배제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영화는 내내 진중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정확히 김지영(정유미)이라는 캐릭터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확고히 한다. 그것은 하나의 문을 만드는 것이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이 방과 저 방을 이어주는 하나의 문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이다. 딱딱한 콘크리트를 뚫고 서로 왕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문으로 불러왔고 문으로 밖에 부를 수가 없다. 지영이 해리성 정신장애를 겪는 것은 단순히 그동안 그녀가 받아왔던 온갖 성차별의 여파의 결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영은 자신의 어머니, 대학 동창, 자신의 할머니로 빙의한다.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여성이 되어서 그들을 대변하고 외부세계와 소통하려 한다. 그녀의 해리성 정신 장애는 비록 그것이 정신적인 병일지언정 문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한 명의 여성이 이와 같은 수많은 차별과 피해를 겪은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몇몇의 쓸데없는 담론에 반대한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 이와 같은 차별과 피해를 혼자 겪어 온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는 문이 되어 저쪽 세계 그동안 닫혀 있던 저 방 속에 존재하는 자들을 보여주는 창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82년생 김지영>은 몇 개의 과거를 플래시백 하는 에피소드들과 현재의 커다란 줄기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나 현재의 커다란 줄기는 어쩌면 각기 다를 수 있는 상황들이 얽히며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차별’의 민낯이다. 이런 식의 플롯은 우리가 일전에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생충>이다. 승승장구하던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문광(이정은)이 재등장한 이후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는데 그 미끄러짐은 하염없이 이어지고 결국에는 기택을 지하벙커에 가둬버리기에 이른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으냐면 실제의 세계는 그처럼 정교하게 미끄러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플롯을 짜 놓았다는 것이다. 지영의 아픈 모습을 직접 보고 온 친정엄마 미숙(김미경)이 집에 오자 친정아빠 영수(이얼)가 아들에게만 한약을 주었다는 것은 어쩐지 동떨어진 에피소드를 이어 붙인 것 같다. (그것이 실재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미끄러지지 않을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하며 그 가능성들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에게 그것은 ‘계급’이었고 <82년생 김지영>의 감독 김도영에게 그것은 ‘성차별’이었다. 이런 식의 플롯을 통해 관객들은 그것의 정체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마치 무분별하게 운동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 한 곳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저 그 차별을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이 얼마나 우리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의 비관적인 상황을 웃어넘기는 많은 여성 조연들을 배치하고 남편인 대현(공유)은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애를 쓴다. 대현의 모습은 우리의 대안처럼 느껴진다.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아내의 병을 알려주는 대현은 방과 방 사이의 문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진중하다. 감독은 소통의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